<개념어사전>에서 발췌
가끔 우리는 방송이나 라디오 혹은 오프라인을 통해서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말들을 듣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리더십을 갖춘 사람만이 진정한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라는 말이나 '건전한 생각과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 수 있다’라는 말과 같이 너무나 도덕적으로 당연한 말들은 너무나 상식적입니다. 이런 말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같이 들리기 때문에 무의미하게까지 들립니다. 우리들은 이런 의견이나 주장은 하나의 텍스트라고 지칭합니다.
흔히 텍스트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해되거나 해석될 여지가 전혀 없는 투명한 텍스트만이 직접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예가 바로 교통표지판의 문구입니다. ‘좌회전’이나 ‘유턴 금지’ 같은 텍스트는 있는 그대로 그 의미가 받아들여집니다. 법률용어도 그렇습니다. '살인죄는 사형, 무기징역 혹은 5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한다’라는 형법의 조항은 누가 봐도 그 의미가 명확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이런 단순한 텍스트는 찾기 힘듭니다. 텍스트는 거의다 해석의 대상이며 텍스트의 해석이나 오해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는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오해를 유도하는 텍스트 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헤어질 때 의례적으로 하는 말들 중에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같은 것이나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세요’ 같은 말들을 교통표지판이나 법률의 조항 같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속 안의 의미를 오해하게 된다. 이 경우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 자체에서 나오지 않고 텍스트를 둘러싼 상황이나 맥락, 즉 콘테스트에서 나옵니다.
물론 실제의 의미와 연관된 콘텍스트를 직접 노출시키면 오해를 없앨 수 있지 않겠냐라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맛없어도 맛있게 먹어야 해”, 당신 같은 사람에게 이 정도 음식은 과분해”와 같이 말한다면 화자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다고 해도 대화와 소통은 불가능해집니다.
따지고 보면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거의다 콘텍스트를 텍스트로 포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친구에게 “그래, 너 잘나서 좋겠다’라는 텍스트를 듣고 “내가 잘나서 부러워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즉 텍스트를 발신하는 사람은 수신하는 사람이 이미 텍스트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콘텍스트에 따라 해석이 가해 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니체는 진리를 묻지 말고 누가 진리를 말하느냐를 물으라고 말했습니다. 진리, 정의 행복, 도덕 같은 개념들은 텍스트상으로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개념들을 구사하는 측의 의도가 불순할 경우 니체식으로 말하면 ‘권력’에 의해 굴절된 경우 텍스트에만 주목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