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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woong Aug 11. 2016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두서 없이 적어가는

모더니즘이라는 외래어는 일차적 해석으로 ‘근대주의’ 즉 “20세기 서구 문학.예술상의 한 경향 "이다

모더니즘을 “현대의 문화에 순응하려는 사상”이라는 뜻의 ‘현대주의’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예외적이다.

미국에서 현대주의를  언급하려 할 때 contemporary Art, Design 처럼 ‘동시대’라는 단어를 쓰곤하는데, 이는 모더니즘을 현대주의의 의미로 사용했을 때 야기되는 의미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짐작한다.

(: 모더니즘은 근대주의, "20세기 서구 문학, 예술상의 한 경향이다. 현대주의와는 구별 되어야 한다.)

   

    오늘날 미국의 모더니즘은 절충주의와 모더니즘으로 나뉜다. 절충주의 디자이너는 실업학교와 일터에서 디자인을 읽힌 상업예술가의 후예이다. 그들은 고전적인 스타일부터 최근의 스타일까지 모든 시대의 지역적인 특성을 인정하고 작업에 반영한다. 그에 반해 모더니스트 디자이너의 특징은 독자적 이해와 모더니즘식 해석을 통해 그 가치가 평가된다. 이 두가지 사상은 큰 패러다임이다. 최근에 이 패러다임의 반작용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고, 이전 패러다임이 자아낸 문제점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도 말한다.

(: 미국의 모더니즘은 절충주의와 모더니즘으로 나뉜다. 절충주의 디자이너는 상업예술가의 후예로 정의 되며, 그들은 과거부터 최근 스타일까지 특성을 인정하고 작업에 반영한다. 반대로 모더니스트 디자이너의 특징은 독자적 이해와 모더니즘식 해석을 통해 그 가치가 평가된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의 반작용을 포스트 모더니즘이 등장한다.)


    요즘 디자이너는 대부분 학교 교육을 받고 디자인 역사에 대한 최소 지식을 갖춘다. 그래서 절충적인 디자인 접근 방법은 노스탤지어나 키치로 한정되고는 한다. 이런 것들은 돈벌이에 이용하기에 좋다. 실증 난 것보다 새로운 것이 팔아먹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절충주의의 가장 큰 상업적 가치는 사람들의 공통 취향을 공략할수 있다는 점이다.(: 절충주의는 상업적이며, 사람들의 보편적인 취향을 공략한다.)


    새로운 절충주의는 모더니즘의 반대 의미로 통한다. 말하자면, 장대한 모더니즘의 손길이 닿지 못한 부분을 모두 모아 담은 잡동사니가 바로 새로운 절충중의다.


    과거의 절충주의적 디자인은 굳이 연구해야할 만큼 중요히 여기지 않았고,그래서 알려진 바도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알아낼 수 있는 열쇠는 과거의 절충주의에 있다.


    과거의 많은 이론가 비평가 또는 저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무시하고 그것을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팽배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릭 포이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우리 사회 깊숙하게 들어왔으며 분명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여건’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전한다. 현재의 삶을 구성하는 그것의 중추적 역할이 그토록 분명한데도 여전히 ‘이론화’하려는 시도는 미약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우리의 일상에 깊숙하게 파고들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이론화'하려는 시도는 미약하다.)


    [탈현대성의 조건]의 저자 데이비드 하비는 ‘어떤 질문에 대해 오직 하나의 적절한 답을 공리로서 지니는 것. 이로써 만물은 우리가 그것을 바르게 묘사하고 설명할 때에만 통제되고 사리에 맞게 지시되는 것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재현의 오직 한 형태만 가정하기에, 만약 우리가 그 실체를 드러낸다면. 계몽중의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고 기술한다.(:위의 데이비드 하비의 말은 보편적인 모더니스트의 말이며, 담론을 불러 일을으키는 말이다. 공리라는 것은 진리에 가까워 지는 것일까? 정의되고 이론화 되어지고 통제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포스트모더니즘의 생산물들에게서는 분열, 형태의 불순함, 깊이 없음, 불확정성, 텍스트간의 상호관련성, 다원론, 절충주의 그리고 토착성으로의 회귀 등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관찰된다. 


    모더니스트의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독창성에 대한 강박적인 관념은 패러디와 모방, 이전 형태들의 아이러니한 재생과 증식을 맞닥뜨리며 그 진행을 멈추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닌 문제가 야기하는 속성은 그것에 접근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제공함과 아울러 그 자체가 해석에 대해 되도록 개방적이게 한다.


    티모 칼맨, 에드워드 펠라, 데이비드 칼슨은 정석적인 규칙의 디자인을 하기 보다는 그것과 싸우는 디자인을 많이 해왔다. 그들은 언제나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을 시도하고, 주저없이 논쟁에 참여해서 규칙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다. 상업 디자인의 틀안에서 이제까지의 어떤것과도 닮지 않고, 오로지 그것에 맞서는 디자인을 만들도록 했다. 하지만 그들은 디자인에서의 관례들에 대한 완벽한 숙지를 바탕으로 그런 규칙을 파괴해왔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그래픽 디자인을 연계시키며 개괄 적인 비평을 시도해야한다. 

첫번재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이 아무리 까다롭고 문제적이며 모호해 보이더라도 그것이 분명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이시대와 그 여건을 생각해보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디자인 잡지들과 여러 단행본이 포스트모던 그래픽디자인을 다뤄 왔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철저하게 그것만을 주제로 했던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post; 후’라는 접두사로 인해 모더니즘의 뒤를 잇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모더니즘을 대채했건 거부했건 많은 비평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숙주로 한 기생체인것과 그 의미가 변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모더니즘과 그것이 지니느 특징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모더니스트들, 즉 인간이 이성과 과학을 통해 끊임 없이 진보할수 있다는 18세기의 계몽죽의적 신념을 물려받은 이들이 자신들이 이어온 진보적 이상들에 대한 신념을 물려받은 이들이 자신들이 이어온 진보적 이상들에 대한 신념을 탈각하는 지점에서 생각난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숭고함에의 요구들이나 만물을 해설하며 종교, 과학 혹은 정치를 통해 개인을 통제하는 것을 모색하는 메타 서사들을 의심 어린 눈길로 바라본다.


    모더니즘은 더 좋은 세계를 창조하기를 희구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모더니즘은 무엇이 인간을 위한 최선의 것이었는지를 깨닫기 위해 초월적 관점을 요구하고 흔히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전제로 한 상업문화에 대해 공격을 감행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가치있는 ‘고급’의 문화와 쓰레기 같은 '저급’한 문화 사이에 놓인 모더니즘의 위계적 차별은 무너지고 평등한 가능성을 지니게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생산물은 분열, 형태의 불순한, 깊이 없음, 불확정성, 텍스트간의 상호관련성, 다원론, 절충주의 그리고 토착성으로의 회귀 등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관찰된다. 


    규칙을 깨뜨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은 규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의 정확한 진행과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만이 그것을 비평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그것을 업신여기는 와중에도 어떤것이든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부가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디자이너 밥 길은 “그래픽 디자인에 관한 모든 규칙들을 잊어버립시오."

티보 칼맨이 “규칙이야 좋지. 그걸 깨부수란 말야"


    미스터 키디는 '우리(we)'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이론이나 평론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저자를 타자화 한다. 그런 건 미스터 키디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처음부터 객관적 어투 따위를 염두에 두고 쓴 시시한 글이 아니다. 객관성을 가장해 책임을 회피한다든지 적당한 거리 두기로 허세를 부리는 대신, 교훈을 주고 싶을 땐 확실히 설교하고, 화가 날 때는 심한 소리를 내뱉고, 짜증 날 때는 냉소적으로 비꼰다. 그는 진심으로 달려든다. 쩨쩨한 술수를 부리거나 전략적 차별화를 걱정하는 타입이 아니다. 덕분에 독자의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긴 하지만 그 어떤 디자이너도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를 부정하긴 어렵다.


    상황은 많이 변하지 않았다. 2013년, 한국의 그래픽 디자이너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수레바퀴를 기름칠 하고, 어설프게 전문가 행세를 하고, 모더니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포스트모던에 무지하고, 멍청한 소리를 되풀이하고, 스타일의 힘을 간과하고 있다. 학교는 학생을 취업시키기에 바쁘고, 대학원생은 글쓰기를 두려워하고, 실무자는 야근에 쫓기고, 유명 디자이너는 자기 홍보에 바쁘다. 먼 나라 남 얘기로 치부하기엔 미스터 키디의 직언이 한국의 그래픽 디자인 사회를 너무나 투명하게 비춘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 분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신생 분야에 들어온 우리는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디자이너는  청중이라는 말을 회피하고 사용자라는 말을 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디자인을 능동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자 한다.


    디자인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판다라는 마을 쉽게 내뱉는다. 제품을 파는게 아닌데, 여기서 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팔리느건 정확히 어떤 것인가? 디자이너의 판단과 기준이 팔리는 걸까? 디자인은 어떤 근거로 팔려나가는 걸까? 잘팔리는 디자인이 그렇지 않은 디자인보다 나은 것일까? 좋은 디자인은 언제나 충분히 존재해왔다. 단지 그것은 팔리지 않을 뿐이다. 잘팔리지 않는 수준 높은 원칙을 고수하는 것보다 잘팔리는 디자인을 하는 쪽이 더 쉽다. 그러나 잘 팔리는 디자인을 하면 할수록 디자이너의 원칙은 무너지고 디자이너를 둘러싼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잘 팔리는 디자인을 하면 할 수록 디자이너의 원칙은 무너지고 디자이너를 둘러싼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고 이야기한다.


    디자인과 돈은 비례관계가 아니다. 좋은 디자인이 돈을 많이 벌어다 주지 않는다. 비례관계란 '악질 디자이너 일수록 고용료가 비싸다.’ 말에 작용한다. 

  






  _참고서적

no more rules_디자인의 모험

지금,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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