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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희 Apr 23. 2020

같은 편

 내가 독립을 하면서부터 엄마와 나는 전화 통화를 자주 했다. 대부분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내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집에서 함께 살 때도 엄마는 늘 들어주는 역할이었고, 나는 하루 있었던 일을 엄마 옆에서 조잘조잘 풀어내는 역할이었. 그러면 엄마는 맞장구를 쳐주다가, 나를 토닥여주다가, 엄마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독립을 하고 나서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나는 핸드폰 속 ‘김 여사님’을 자주 찾았다.


 우리에겐 손가락 걸고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늘 지켜지는 재미난 약속이 있다. 엄마와 나는 종종 신나게 통화를 하다가 서운한 문장이 마음을 찌르면 한동안 전화를 하지 않고 지낸다. 뜸해진 전화로 알 수 있는 서운함.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삐졌다는 걸 알려주는 줄어든 전화 횟수. 그런 시간이 있은 뒤로는 한참을 올려야 보이는 저 밑에 있는 통화목록 속 엄마의 자리.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서로에게 삐진 마음을 표현했다. 서로에게 토라진 시간을 깨는 방법은 대체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라던가. 내가 수다 떨 사람을 찾다 결국 ‘김 여사님’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엄마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전화를 받아 멈추는 방법을 잊은 이야기를 들어준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고, 토라진 마음도 직접 말하지 않는 우리 사이. 이상하게 늘 지켜지는 우리의 약속. 그런 우리가 아주 진하게 끈끈한 우정을 보일 때가 있다. 역할명은 ‘며느리’, 우리가 같은 편이 되는 순간이다.


 결혼하고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오는 일이 나에게 너무 오래 머물 때가 있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내 마음을 정리하고 통화목록 속 ‘김 여사’를 찾아 누른다. ‘오늘은 뭐했냐’는 말로 노크를 하고, ‘지난번에 어머니한테 이런 말을 들었는데’라는 말로 문을 여는 이야기. 차분하게 시작했던 내 목소리는 감정에 사로잡혀 점점 커지고, 도통 가라앉지 못한 채 오랫동안 쏟아진다.


 내가 한바탕 어지러웠던 마음을 쏟아내면, 엄마는 “많이 속상했겠네. 그래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어.”라고 말해준다. 한 번을 같이 나의 시어머니 흉을 보는 법이 없는 엄마. 가끔은 속 시원하게 같이 시어머니 흉을 봐줬으면 싶다가도, 엄마의 한마디에 수그러드는 내 마음이 편안해 어느새 잊는다. 내 목소리가 차분해질 때쯤 엄마는 엄마의 시어머니 흉을 보기 시작한다. 나를 끔찍이도 예뻐했던 친할머니이자 김 여사의 시어머니. 내가 알지 못했던 김 여사 시어머니의 언행은 몹시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한다. 김 여사의 시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같은 며느리로서 동지애가 불타오른다.


“할머니가 그때 그랬어? 아니. 너무했네. 에잇. 아니 무슨 그런 말을 해?”

“할머니가 그때 엄마한테 그런 시집살이를 했었어. 어휴”

“아니. 집에 왔다 갔으면 됐지. 뭘 또 오라고 해? 차도 없는 엄마한테!! 어린애들 둘을 데리고!!

아 진짜 너무했네. 할머니. 할머니에 비하면 우리 어머니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 순간 우린 같은 편이 된다. 우리의 거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순간. 우리의 우정이 열정적으로 활활 불타오른다. 내가 결혼을 하고 생긴 아주 재미있는 시간이다. 시간 가는지 모르게 흐르는 우리의 대화는 꽤 흥미진진하다.


 엄마와의 통화를 끝내고 나면 내가 괜히 엄마 걱정시키는 일을 한 건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토닥거림 뒤에 숨은 걱정을 모르지 않는다. 엄마에게 시어머니 흉을 보면 분명 엄마는 오랜 시간 걱정하고 마음 아파할 거다. 많은 일을 오래 붙들고 사는 건 엄마를 닮은 거기에 너무 잘 안다. 나는 엄마에게 털어냈지만, 엄마는 한동안 내 마음을 붙들고 지내겠지 싶어 걱정이 밀려온다. 습관적으로 통화목록 속 ‘김 여사님’를 찾는 내가 어리석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직은 엄마의 토닥임과 응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통감한다. 아마 오랫동안 나는 통화목록에서 ‘김 여사님’를 찾아 누를 거다. 그리고 오랫동안  여사의 시어머니 흉을 들어주고 싶다.


사랑해 김 여사. 우리 우정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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