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윽 이거 꼭 열 개 먹어야 해? 나 지금 세 개 먹었는데… 엄마, 못 먹겠어. 먹기 싫어.
“올해는 열 살이니깐 열 개 먹어야 해.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 열 개만 먹으면 더 안 먹어도 돼.”
열 번째 생일이던 날 식탁 위 동그란 접시에 탑처럼 쌓이고 있는 수수팥떡을 놓고 엄마와 실랑이를 벌였었다. 아홉 살이던 해에는 아홉 개를 먹어야 했고, 열 살이었던 해에는 열 개를 먹어야 했다. 테니스공보다는 작고, 유리구슬보다는 컸던 팥고물이 잔뜩 묻어있는 텁텁한 떡. 단맛도 없고 어린 내 입에는 너무 힘들었던 맛. 엄마는 내 첫 생일 때부터 열 살 생일까지 10년 동안 수수팥떡을 만들었다. 두 살 터울인 내 동생 몫까지 더하면 12년 동안 수수팥떡을 만든 거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잡채와 미역국 그리고 밥공기 가득 봉긋하게 올라와 있는 흰쌀 밥을 먹었던 날. 항상 잡곡밥만 먹는 우리 집이 유일하게 흰쌀밥을 먹었던 유일한 날, 뜨거운 여름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다. 그날은 수수팥떡을 정성껏 빚는 엄마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밥공기 가득 높이 솟아오른 하얀 동산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와, 이걸 어떻게 다 먹냐며 매년 생일 때마다 투덜거렸다. 그 투덜거림이 사라지기도 전에 접시 위로 하나씩 쌓이기 시작하는 수수팥떡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었다.
여섯 살에도, 여덟 살에도, 열 살에도 하나씩 늘어나는 수수팥떡의 개수가 두려웠다. 한 살씩 더해질수록 식탁 앞에 앉아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는 시간은 늘어났었다. 먹기 싫은 퍽퍽한 팥떡을 해치우고 나면 진이 빠졌다. 그때의 수수팥떡으로 나는 지금까지도 팥이 들어간 음식은 거의 먹지 않는다. 팥이 들어간 붕어빵도 내 돈 주고 사 먹기 시작한 지 10년도 채 안 됐다. 빙수를 먹으려면 되도록 팥이 없는 빙수를 찾아 먹는다. 팥죽은 정말 아직도 너무 싫다. 동지 때마다 팥죽을 먹는 일도 엄마와 함께 사는 동안은 매번 전쟁이었다. 팥 칼국수는 말해 뭐하나. 내가 좋아하는 면이 팥에 빠지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맛이다.
엄마는 지금도 팥을 먹지 않는 나에게 몸에 좋은 팥을 왜 먹지 않는 거냐며 의아해한다. 그런 질문을 하면서 팥죽을 너무 맛있게 먹고 있는 엄마가 신기했다. 나는 늘 엄마의 수수팥떡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냥 맛이 없다는 말로 둘러댔었다.
내 가정을 만들고 맞이하는 첫 생일날, 엄마의 수수팥떡이 생각났다. 열 살 때까지 생일만 되면 나를 울상으로 만들던 수수팥떡이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매년 변함없이 수수팥떡을 빚던 엄마 옆에서 먹기 싫다고 투덜대던 내 모습이 떠올라, 엄마에게 미안했다.
내가 직접 요리를 하며 살아보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엄마는 10년 동안 뜨거운 여름날 불 앞에서 몇 시간을 서서 주문을 걸며 떡을 빚었다. 엄마가 12년 동안 꼬박꼬박 수수팥떡을 빚었어야만 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엄마에게 내가 어릴 때 왜 그렇게 수수팥떡을 만들어 먹인 거냐고 메시지를 남겼고, 엄마에게서 온 답장은 밝은 대낮에 나를 울게 했다.
“둘 다 엄마에게는 소중하니까.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든 일은 그냥 바람처럼 지나가라고.. 옛날 어른들이 10살까지 수수팥떡을 해주면 아프지 않고 잘 자란다고도 했었어. 험한 세상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컸는데, 아주 속상했지.”
90년대 초반에는 지금만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앉아 정보 공유가 어려웠기에 쉽게 레시피를 검색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시어머니가 알려준 데로 만들었다고 했다. 실수도 반복하고, 방앗간도 아닌 집에서 만든 수수팥떡. 12년 동안 정확하지 않은 레시피로 엄마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을 따뜻한 주문만 잔뜩 모아 담은 떡. 엄마는 어린 나이에 그게 맛있을 수가 없다며 오히려 그때의 나를 이해해줬다.
그리고 엄마의 주문과 달리 어릴 적 나는 자주 아팠었다. 응급실을 내 집처럼 들락거렸고, 얇은 팔뚝에서 혈관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찔리는 날이 허다했다. 당신 때문이 아니었음에도 이혼가정에서, 재혼가정에서 자라게 만들어서 늘 미안하다는 엄마. 속상했다고 말하는 거보니 엄마는 그때 본인이 열심히 걸었던 주문이 통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동생 몫까지 12년 동안 수수팥떡 빚은 일을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내 엄마. 다음 생에 또 나랑 동생이 엄마 자식으로 태어나도 똑같이 수수팥떡을 빚을 거냐 묻는 딸에게 엄마는 내 엄마이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을 해줬다.
“물론 또 해주겠지만 다음에는 엄마 딸로 태어나지 마. 좀 더 좋은 환경을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거 구애받지 말고, 기죽지도 말고 그렇게 살어.”
엄마가 모르는 게 있다. 몇 번의 아프고 힘든 일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옆에 항상 엄마가 있었기에 내가 흔들리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는 사실. 바람이 남들보다 조금 강하게 불었을 뿐, 넘어져 상처가 난 적은 없었다는 거. 당신이 내 엄마이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따뜻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고. 엄마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정성 어린 주문은 이뤄졌고, 요즘은 엄마가 빚어주는 주문에 걸린 수수팥떡이 너무 먹고 싶다고.
그리고 내 인생의 아픈 날은 엄마 때문이 아니었으니 내 몫의 슬픔에 대해 자책하며 살지 말았으면 한다. 다음 생에도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야 한다면 나는 재주 많은 김 여사의 딸로 태어날 거니, 우리 그때는 더 즐거운 삶을 살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