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누워 어제 엄마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다, 엄마의 스물아홉이 궁금해졌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된 그녀의 스물아홉. 내 존재가 함께였던 그녀의 스물아홉을 상상했다. 나의 스물아홉은 여전히 흔들리고 다시 일어서는 일을 반복하는데, 나는 엄마가 되는 일이 아직 많이 망설여지고 겁이 나는데, 아이까지 있었던 그녀의 스물아홉. 어떤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많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스물아홉이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을지 짐작할 수 없었기에, 더욱 망설여졌다. 한참을 고민하다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는 스물아홉 살 때 뭐 하고 지냈어?”
여러 장면을 상상하고 고민하다 적은 한 줄이 ‘뭐하고 지냈냐’ 라니. 메시지를 받은 엄마에게 어떤 답이 올지 아득하기만 했다.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메시지를 보낸 탓이었을까. 엄마에게서 바로 답이 오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답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고, 엄마는 해가 뜨고 오후 1시가 되어 답을 보내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엄마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엄마에게서 온 답장은 집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을 무색無色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 두 발 자전거를 막 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미숙한 운전실력으로 종종 부딪히고 넘어졌었다. 어느 날은 넘어지는 방향을 잘못 선택해 자전거 손잡이에 심장이었는지 폐였는지 모를 내 몸 어딘가를 강하게 부딪히곤 했었다. 강한 부딪힘은 나를 금방이라도 졸도시킬 듯한 숨 막힘을 느끼게 했었는데, 엄마의 메시지가 한 줄씩 더해질 때마다 그때의 통증이 느껴졌다.
“너가 네 살이었응게 매일 할머니 집에 너희 둘 데리고 아침에 갔다가 오후 4~5시쯤 집에 왔는갑네”
“가서 할머니랑 같이 아점 묵고 청소하고 할머니 옷 다림질하고”
“네 동생 돌 지나면서 할머니 신당 모셔서 뒷바라지 혔고”
“너희 둘 할머니 신당 꾸민 거 안 보여주려고 너희 둘 낮잠 재워놓고 댕겨올 때도 있었네”
“처음에 그랬어 엄마도 놀라고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는 말로 마무리된 엄마의 스물아홉. 세상이 멈추고,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물드는 순간이다. 아이를 돌보느라 벅찼을 거라는 정도만 예상했던 내가 너무 속단했다 싶었다. 자신을 돌볼 여유가 조금도 없었던 그녀의 스물아홉을 다시 꺼낸 내가 미웠다. 엄마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그리고 누구의 며느리가 먼저인 삶을 살았구나.
스물아홉의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녀는 아이 둘을 보살피며 얼마나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까. 감히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꾸미는 걸 좋아하고, 재주가 많은 그녀도 오롯이 본인이 일 번인 삶을 살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 거다. 결혼하고 아직 아이가 없는 나도 종종 오롯이 나일 때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갑자기 밀려오고는 한다. 나도 이런데 엄마는 얼마나 더 그랬을까. 아니,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을까.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엄마는 나와 동생의 유치원 때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영상을 메모리로 담아주는 곳이 있냐며 물어왔다. 내가 허우적거리다 빠져나오지 못할 걸 알았던 걸까. 엄마는 빠르게 장면을 바꿨다.
많은 날 본인의 행복보다 딸인 나의 행복이 먼저였을 그녀. 이제는 그녀가 누구도 아닌, 본인이 일 번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많은 순간이 웃음으로 가득해져 알록달록 오색찬란하게 물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