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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희 May 12. 2020

통통하고 폭신한 하얀색 풍선

 나와 동생의 놀이터였던 엄마의 정원에는 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턱을 찍어야만 끝이 보이는 목련 나무가 있었다. 매년 봄, 목련 나무가 꽃을 피우는 날을 많이 기다렸었다. 그 이유는 봄에만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련 잎으로 풍선을 불 수 있다는 신기한 놀이를 누가 알려줬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얻은 놀이가 주는 부풀어 오르는 기쁨이 너무 좋았다.


 목련 나무가 풍성하게 꽃을 피우면 동생이랑 흙 위에 떨어진 달걀 모양처럼 생긴 목련 잎을 주으러 목련 나무 그늘로 향했다. 우리는 흙 위에 누워있는 꽃잎을 요리조리 살피며 마음에 드는 풍선을 주웠다. 그리고는 꽃잎 주변에 묻은 흙을 살살 털어 입구를 조심히 뜯어 바람을 불어넣었었다. 너무 세게 불면 터질라, 허파에 신중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입술로는 미세하게 힘 조절을 했었다. 이 순간 이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는 것 마냥 목련꽃 잎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통통하고 귀엽게 부풀어 올랐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어 만지면 금방 터져버리는 폭신한 하얀 풍선. 키가 작아 더 탱탱하고 폭신한 풍선 잎을 딸 수 없어 흙 위에 누워있는 잎을 주워 부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고무 냄새 가득한 풍선보다 더 재미난 놀잇거리였다. 나는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지 않고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기다리다 보면 마음껏 불 수 있는 풍선을 선물해주는 봄과 목련 나무가 좋았다.

 

 하루는 하얀 목련만 있던 엄마의 정원에 자주색 목련이 생겼다. 현관문을 열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우아함이 가득 느껴지는 자줏빛 꽃잎을 가진 목련 나무. 하얀 목련 나무보다 키도 몸집도 작았던 자목련 나무가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 키라면 내가 직접 목련 나무 꽃잎을 따서 더 통통하고 오래가는 풍선을 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목련 나무가 어서 꽃잎을 피우길 기다렸었고, 봄이 오자 자그마한 게 꽃잎을 피운 자목련 나무. 나는 까치발을 세워 자줏빛 꽃잎을 한 장 떼 설레는 마음으로 불었었다.


 하지만, 자주색 꽃잎은 하얀 꽃잎과 달리 쉽게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몇 장의 꽃잎을 뜯어 불고 또 불어 보았지만 통통하고 폭신한 풍선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날, 나는 크게 실망했었다. 자목련 잎이 피기만을 기다렸는데, 내 작은 키로 충분히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그 뒤로 종종 자목련 나무가 꽃잎을 피우는 봄이 오면 현관문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던 그 녀석이 미웠다. 매년 봄 내게 허탈함을 안겨 준 그 녀석을 뒤로하고 하얀 목련 나무 아래로 향했었다.


 이제 더는 찾아갈 수 없는 엄마의 정원에서 보았던 목련 나무를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본다. 벚꽃이 피는 시기와 비슷할 때에 풍성하게 잎을 띄우는 목련 나무. 엄마의 정원도, 엄마도, 동생도 생각나게 해주는 폭신한 풍선이 가득 달린 나무.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작은 키로 직접 뜯을 수 없는 목련 나무 꽃잎.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있는 목련 꽃잎을 보면 동생을 불러다 신나게 주워서 흙을 털 풍선을 불고 싶어 지지만, 핸드폰을 꺼내 흙 위에 누워있는 꽃잎만 잔뜩 사진을 찍는다.

 

 언젠가 나도 엄마의 정원처럼 부지런함과 정성이 가득 담긴 흙냄새를 선물하는 곳을 가꾸게 된다면, 제일 먼저 목련 나무 두 그루를 심을 거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에서 내가 선택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목련 나무 풍선을 불어 보는 날을 그려본다. 또, 나보다 키가 큰 동생과 함께 흙 위에 누워있는 목련꽃 잎을 주어 봉실봉실 웃으며 시간을 보낼 거다. 내 가족에게 그리고 나와 동생에게 바람이 살랑거리는 봄이 오면 함께 나눌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준 엄마가 있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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