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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희 Apr 21. 2020

어린 친구의 보물상자

 주말 저녁 꼭 챙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미리 시청 예약을 해두고, 드라마를 보기 전 세수를 하고, 간식을 챙겨 소파에 앉아 시청자로서 최고의 준비를 한다. 오늘 어떤 전개가 이어질지 설렘에 가득 차 있을 무렵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름으로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 확인을 누르지 못한 채 짧게 보이는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내용을 보며, 반가움보다는 이거 뭐지? 스미싱인가? 하는 의심이 앞섰다.


 내가 단번에 어! 반가워라 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최근 핸드폰을 바꾸고 연락처 정리를 했기 때문이다. 번호를 옮겨 주겠다는 핸드폰 가게 직원의 권유에 괜찮다고 사양을 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서로의 안부도 묻지 않은 채 핸드폰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을 구 핸드폰에 남겨두고, 부담 없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연락처만 직접 새 핸드폰에 저장했었다. 그랬기에 내가 새 핸드폰에 저장하지 않은 인물, 이 사람은 분명 나랑 오랜 시간 연락을 하지 않은 사람일 텐데. 핸드폰 가게 직원이 스미싱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누군가가 이 사람의 메시지 계정을 해킹해서 나에게 접근하는 건가? 그래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나도 얼마 전에 SNS 계정 해킹당한 적이 있으니까. 메시지 확인을 해도 되는 건가? 만약에 스미싱이 아니고 정말 순수한 목적의 메시지라면 어떻게 하지? 나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는 걸 잊은 채 소파에 앉아 한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메시지를 본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니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엄지손가락으로 눌러본 메시지에는 같이 태권도를 다녔던 누구인데 기억하실지 모르겠다는 말로 시작해, 심심해서 보물상자를 열어봤더니 그 안에 내가 준 그림엽서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언니는 잘 지내고 계시냐고 묻는 안부였다.


 메시지를 읽고 ‘너무 반갑다! 스미싱이 아니었구나!’라고 안심할 수 없었다. 내 엄지손가락은 정지화면 속 모습이었고, 뇌는 빠르게 촤르 인물 사전을 넘기고 있었다. 스미싱이라는 시나리오에서는 벗어났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내 인물사전에 어린 친구는 없었다.


 태권도라니. 6년 전에 체력을 목적으로 성인이 한 명도 없는 태권도 학원에서 중 고등학생 친구들과 함께 운동했던 시절이 있다. 나보다 뛰어난 발차기 실력과 텀블링을 겁도 없이 멋있게 해내는 친구들 틈에서 엄마 잃은 오리 새끼마냥 보내던 시절. 함께 운동하는 어린 친구들이 엄마 오리가 되어주던 시절. 엄마 오리들의 이름과 나이를 매번 잊었던 시절. 그래서 3일에 한 번꼴로 오른쪽 친구에게, 왼쪽 친구에게 수줍게 속삭이며 이름을 묻고 또 물었었다. 그 결과 나는 이름과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23살 언니, 누나로 기억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저장된 이름과 얼굴은 30명 남짓한 친구 중 단 3명뿐이었다. 나를 기억해주는 어린 친구는 그 3명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메시지는 읽었으니 답장을 보내야 했다. 나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지만, 그냥 아는 척을 해야 할지 솔직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했다. 나는 고민 끝에 솔직함과 변명을 선택했다.


 - “음!!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아.. 내가 워낙 많은 아이를 가르치다 보니 그만큼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서.. 미안해. 내 그림이 보물상자에 있었다니! 너무 감동이야. 고마워.”


 혹시나 내 메시지를 보고 친구가 실망하거나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이런 변명을 만들 수 있게 해 준 지난 직업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고, 어린 친구에게서 온 답장을 읽고 변명에 감사함을 느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 “기억이 안 날 수 있죠! 앞으로도 잘 보관할게요!! 저도 좋은 그림 주셔서 고마워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는 작고 어린아이들이 커서도 나를 기억해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종종 시간에 묻혀 아이들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다 결국 잊혔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하고 아쉬웠다. 그런 내가 어린 친구에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니. 내 변명에도 실망한 내색 없이 오히려 나를 이해해주는 어린 친구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의 변명을 뒤로하고 우린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나이도 묻고, 오랜 사이처럼 내 몸에 타투는 아직도 있는지 물어오는 친구가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 우리가 근황 이야기를 신나게 하는 사이 드라마는 다음 이야기 예고를 하고 있었다.


 어린 친구의 보물상자에 소중함이란 이유로 6년 동안 공짜로 머물렀던 내 그림엽서. 앞으로도 같은 이유로 그 친구의 보물상자에 머물 내가 만든 물건. 많은 날 소중함을 잊지 않고 사는 열아홉 어린 친구의 보물상자에 늘 따뜻한 행복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다음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진다. 어서 빨리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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