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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희 Apr 21. 2020

뜨거운 밤이 지나고


 가끔 말 한마디 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아픈 날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 걷는 것도 힘들어 몇 걸음 되지 않는 화장실도 자꾸 미루게 되는 아픔을 마주한 날. 이불속에 내 몸을 감추고 누워만 있어도 초 단위로 내 몸의 에너지를 누군가 쏙 쏙 빼먹는 것 같은 날.


 그런 날은 꼭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음식. 그녀의 정성과 사랑 그리고 걱정이 가득 담겨 에너지가 다시 샘솟게 해주는 마법 같은 음식. 아픈 나를 더 서럽게 만드는 음식.


 나의 엄마가 끓여주는 흰쌀 죽. 그리고 죽 옆에 나란히 놓아주는 짭짤한 냄새가 가득한 진한 간장이다. 그 음식은 온종일 내 마음에서 떠나지 못한 채 망설인다. 엄마가 끓여주는 흰쌀 죽을 상상으로 먹어보다 결국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서 물이 흐른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차가운 물이 삐져나와 베개로 떨어지기도 전에 뜨거워진다.


 전화 한 통이면 맛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화장실을 미루는 마음보다 더 멀리 미룬다. 그러다 다시 저 멀리 밀어버린 마음을 끌어온다. 있는 힘을 다해 전화하고 싶다는 마음을 붙들고, 엄마에게 전화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함께 살지 않는 딸 걱정하느라 엄마의 시간이 잠시 멈추는 게 싫다. 엄마는 분명 나의 집으로 찾아와 흰쌀 죽을 끓여주고, 엄마 집으로 돌아가서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낼 거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 모습을 생각하니 손에 힘이 풀려 잡고 있던 마음이 저 멀리 도망간다.


 도망간 마음을 다시 잡아볼까 고민하다, 얼마 전 대학교 근처에서 혼자 자취하는 동생이 늦은 새벽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던 일이 생각났다. 엄마는 잠이 들어 동생의 전화를 받지 못했었다. 잠에서 깨어 확인한 동생의 부재중 전화 시간은 엄마를 무섭고 위험한 상상 속에 가뒀을 거다.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그날의 일을 이야기했었다. 그날 엄마의 목소리에서 느껴졌던 수많은 감정 중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 슬픔을 음성으로 마주했던 나는 동생을 부러워하는 마음에서 멈춘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는 하겠지만 엄마의 흰쌀 죽이 없어도 내 몸이 정상체온으로 돌아오기는 했기에 이번에도 버텨보기로 한다.


 엄마의 마법 같은 음식이 있었으면 하루짜리였을 뜨거움이 두 번의 보름달을 띄우고 정상체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밤 내 머리를 쓸어내리며 걱정하는 신랑에게 엄마가 끓여주는 흰쌀 죽이 너무 먹고 싶다며, 소중한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말하며 울었던 나를 떠올린다.


 이제는 각자의 집에서 살게 된 엄마와 나는 종종 지나갔던 아픔에 대해 말하지 않은 날이 많을 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엄마의 아팠던 날들. 정상체온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듣는 엄마의 뜨거웠던 밤. 이제는 그녀와 내가 서로에 대한 배려를 조금은 미루고 전화기를 들어 엄마와 딸을 찾는 날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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