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27일 차, 블레드

이 세상이 아닌 것만 같은 블레드입니다

by 현준

오늘은 블레드로 갈 예정입니다. 아침을 먹으려고 주머니를 확인해보는데 현금이 부족합니다. 저번에 마지막 남은 50유로짜리를 썼으니 인천에서 환금해서 가져온 750 유로가 전부 다 떨어진 셈입니다. 드디어 현금을 인출할 타이밍이구나 조금 씁쓸해하며 중앙역으로 가는 길에 ATM에서 현금을 인출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계속 Insufficient Funds라는 메시지가 나오면서 인출에 실패합니다. 몇 번을 시도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에 초조해집니다. 계좌 잔액은 아직 적당히 남아있을 텐데 출금이 되지 않아 답답합니다만 기차 시간이 다가와 일단 기차에 타기로 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요 ATM 선생

기차로 이동하면서 문제의 원인에 대하여 골몰히 생각해봅니다. 만약 가지고 온 카드가 해외 인출이 등록되지 않았다면 자그레브에서 출금 자체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오류 메시지도 Invalid Account 정도로 떴을 겁니다. 그렇다면 한도가 문제일 텐데 신용카드 한도를 전에 넉넉하게 인상해놓고 왔기 때문에 그 문제도 아닐 것 같습니다. 기차로 이동하는 한 시간 동안 문제가 뭘까 찾아보다가 제 계좌에 해외출금에 따로 한도가 걸려있는 걸 확인합니다. 일일 출금 한도가 10만 원으로 아마 처음 신청할 때 기본으로 설정된 한도인 듯합니다. 출금 시 건당 붙는 수수료가 꽤 크기 때문에 가능하면 한 번에 많은 금액을 출금하는 게 나은데 10만 원씩 출금한다면 수수료가 어머어머 해질 겁니다. 다행히 우리 카드의 경우 홈페이지에서도 한도 상향이 가능한데, 문제는 인증수단으로 제 휴대폰이나 공인인증서를 요구한다는 겁니다. 당장에 휴대폰도 정지되어 있고 애초에 해외 유심을 사용 중이며, 공인인증서도 없는 상황에서 이 문제에 맞닥뜨리니 매우 골치 아픕니다. 결국 제 한국 휴대폰을 부활시켜서 한도를 상향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건데, 온라인 상에서 제가 저임을 인증하기 위한 수단이 이렇게 한정적이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해외에 체류 중인 한국인에게 국내 공공 서비스는 너무 불친절합니다.


이 모든 걱정을 일단 뒤로 미루고 여행에 집중해보기로 합니다. 기차를 따라 Lesce Bled 역에 도착하는데 완전히 시골역입니다. 역사에 작은 레스토랑 하나만 있고 사방으로 국도와 산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블레드 호수까지 가려면 5km 정도를 더 가야 하는데, 가는 방법을 몰라 인포데스크를 찾아가니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아침부터 가출한 정신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역에 딱 하나밖에 없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쭈뼛쭈뼛 밥을 주문합니다. 겸사겸사 호수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니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합니다. 버스 시간표를 살펴보니 방금 차가 떠나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5km 정도면 걸어가는 시간이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나 거의 비슷할 것 같아 그냥 걸어서 가보기로 합니다. 날씨가 선선하고 하늘은 맑은데 넓은 광야를 배경 삼아 국도 옆을 걸어가니 마치 로드트립을 떠나는 것 같습니다. 가는 길에는 가끔씩 지나다니는 자전거밖에 없고, 이제 이 공간은 완전히 저 혼자만의 것입니다. 혼자 들떠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걸어갑니다. 지나가는 자전거들이 가끔씩 쳐다보지만 딱히 신경 쓸 일도 아닙니다. 골목골목 길을 헤매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절벽 끝에 매달린 블레드 성이 보입니다.

기차를 타고 떠나요. 자리가 없어 자전거 석에 서서 갑니다
주변에 작은 레스토랑 하나만 있는 시골역입니다
입에 햄버거 하나 베어 물고 떠나 봅시다
국도 길 너머로 수채화 같은 풍경
이 길엔 오직 저만이 서있습니다
걷다가 보니 절벽 끝에 성 한 채가 보입니다


잠깐, 뭔가 이상합니다. 절벽 끝에 세워진 성이라니요? 그림은 예쁩니다만 제 목적지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봅니다. 절경이 멋진 성이라니 제 목적지가 분명합니다. 블레드까지 걸어오느라 이미 진이 빠진 상태인데, 여기서 등산까지 얹다니 말 그대로 산 너머 산입니다. 호수 앞 인포데스크에는 성까지 올라가는 택시들이 줄지어서 있지만, 가격도 비쌀뿐더러 이미 제게 남은 현금이 없습니다. 몸이 힘들고 자시고 선택지가 없습니다. 성으로 올라가는 차도를 따라 등반을 하는데 관광버스들이 계속 저를 제치고 올라갑니다. 다른 건 몰라도 가이드 투어, 패키지 투어가 확실히 이런 점은 편한 것 같습니다. 저처럼 몸으로 때우면서 삽질하는 것을 관광버스에 앉아 편하게 몸만 오면 되다니 부러운 것을 넘어 조금 치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든 산길을 버스를 타고 올라와놓고 고작 성 입구에서 성을 오르는 데 죽는소리를 하시는 걸 보니 살짝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겨우겨우 올라왔는데 성이 너무 높아만 보입니다
계속 가야만 하나요?

어쨌든 고생 고생하면서 올라온 성에서의 전망은 그동안의 고생과 짜증이 확 사라질 정도로 너무나 좋습니다. 파란 하늘에 에메랄드 빛으로 펼쳐져 있는 호수, 호수에서 헤엄치는 사람들, 호수 한가운데 서 있는 섬, 바람에 펄럭이는 슬로베니아 깃발, 산을 기어오르는 사람들까지 장관 그 자체입니다. 블레드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봅니다만, 풍경이 너무 그림 같아서 찍힌 사진이 꼭 합성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호수 색이 이렇게 선명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블레드 성 자체는 매우 작은 성이라서 성 내부에 볼 것은 없습니다만, 시원한 바람과 함께 멋진 풍경을 보고 있자니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동화 속 판타지에서나 볼법한 광경은 몇 번을 봐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너무나 그림같은 성입니다
성 너머로 호수가 보이네요
너무나 색감이 아름다운 호수

호수 구경도 살짝 질릴 무렵, 블레드 성에서 내려와서 블레드 호수를 따라 한 바퀴 산책하기로 합니다. 산 정상에서 보던 광경을 바로 가까이에서 보면 어떤 모습일지 매우 궁금합니다. 산을 내려와 몇 고개를 넘어가니 드디어 호숫가가 보입니다. 호숫가에는 구역을 나누어 놓고 해수욕장처럼 입장료를 받는데 꼭 해수욕장을 보는 듯합니다.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로 한가득한 것이 슬로베니아 사람들의 물놀이 핫스팟인 모양입니다. 호숫가 가까이서 보이는 물은 너무나 선명하고 색이 뚜렷한데 여기서 수영하고 물놀이를 하면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습니다. 확실히 바닷가에서 해수욕하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을 듯합니다. 일단 짠물은 아닐 테니깐 말입니다.


한 시간 반 남짓을 호수를 따라 돌면서 사진을 계속 찍습니다. 호수가 매우 넓은 관계로 호숫가를 따라 돌면서 여러 모습을 보게 되는데, 굳이 해수욕 영역으로 꾸리지 않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고 있습니다. 나무 보트를 태워 주는 사람도 있고, 호수 한가운데 있는 블레드 섬에선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놀러 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점입니다. 연인이 되었든, 친구들이 되었든, 가족이 되었든 말이죠. 저 같은 홀로 여행객은 호숫가를 따라 배낭을 메고 다만 묵묵히 걸어갈 뿐입니다. 혼자 동떨어진 사람인 것 같아 조금 씁쓸한 기분입니다.

호숫가를 따라 걷는 사람들
호수에서 배도 타고 해수욕도 즐기고
호수 뒷편으론 아름다운 마을이 펼쳐져 있습니다
호수 한가운데 서있는 섬과 성당
호숫가를 돌며 풀숲 사이로 언뜻 보이는 풍경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이번엔 호수에서 바라본 블레드 성과 아랫마을

호수를 한 바퀴를 다 돌지 못하고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발을 멈춥니다. 오늘 너무 많이 걸어 다녀서인지 발이 퉁퉁 붓고 더 걷지를 못합니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아무 버스나 타고 돌아가기로 합니다. 제가 멈춘 정류소는 목재로 세워둔 간이 정류소인데, 주변에 티켓 판매소가 보이질 않습니다. 어떻게 버스를 타면 될지 몰라 조금 다급해하는데 마침 캐리어를 끌고 오시는 분이 계셔서 여쭤보기로 합니다. 조금 대화하다 보니 서로 한국인인걸 깨닫습니다. 마침 가는 방향도 같았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동안 다녀본 곳, 앞으로의 여정지, 유럽에 쏟아지는 폭염에 대한 걱정, 사기당한 이야기, 가볼만한 곳의 팁, 소소한 에피소드 등등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여행길에 나누는 대화는 항상 즐거운 일입니다. 정보를 얻는 것도 좋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그냥 대화하는 상황 자체가 즐겁습니다. 한 시간 반 가량을 타고 왔는데 다시 갈 길을 떠나며 해어지니 조금 아쉽습니다.


류블랴나로 돌아오니 밤 시간인데도 거리가 시끌벅적합니다. 요 며칠간 계속 축제라더니 곳곳에서 버스킹도 하고, 비보잉 배틀도 하고 있습니다. 시민 공원에는 무대를 세워 클래식 경연 대회를 하는 모양입니다. 강가를 따라서 돌아오는 길은 테라스에서 저녁 분위기를 한껏 내는 사람들의 연속입니다. 밤거리의 축제 분위기에 흠뻑 젖어드는 블레드와 류블랴나의 하루입니다.

해질녘 바에 앉아있는 사람들
밤이 깊어갈수록 무대는 흥을 더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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