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 26일 차, 류블랴나

작은 것 하나 들뜨고 재밌는 류블랴나입니다.

by 현준

매우 상쾌한 아침입니다. 하루 푹 잠을 자고 일어나니 온 몸이 개운합니다. 밖을 보니 날씨도 선선한 게 돌아다니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오래간만에 좋은 날씨에 어제까지 싹 가라앉아있던 의욕이 셈 솟는 듯합니다. 살짝 들뜬 마음으로 리셉션으로 내려가 아침밥을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보니, 여기 호스텔의 조식은 뷔페식이 아니라 카페식으로 아침을 먹고 싶으면 메뉴를 주문하면 된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토스트와 커피를 주문하니 햄과 치즈가 들어간 뜨끈뜨끈한 토스트를 가져다줍니다. 토스트에 들어간 치즈가 느끼하게 묵직해서인지, 간단한 아침 식사인데도 속이 든든합니다. 어제 자기 전에 정리한 류블랴나 워킹 투어 코스를 구글맵에 표시해두고 숙소를 나서 보기로 합니다. 일곱여덟 시간 코스라고 하는데, 날이 이렇게 좋으면 얼마든지 더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스트와 올리브, 커피 한 잔

호스텔을 나서니 바로 류블랴나의 중심을 흐르는 작은 강 류블랴니카가 보입니다. 강 너머 산 정상에 자리 잡은 타워에 슬로베니아 깃발이 펄럭이는 게 보입니다. 그 타워가 오늘 오전의 목적지인 류블랴나 성입니다. 높은 지역에 위치한 성까지 올라가는 길은 등산길입니다. 동네 뒷산을 마실 나가듯이 가볍게 걷기 시작하지만 정상에 도착하니 숨을 헐떡입니다. 한 숨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정상으로 올라오는 케이블카가 보입니다. 미리 알았어도 날이 좋다며 걸어왔겠지만 막상 올라와보니 케이블카를 타고 왔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격도 편도 2유로 밖에 안 하는데 굳이 땀을 흘려야 했는지 살짝 눈물이 납니다. 그나마 날이 그리 덥지 않은 게 조금 위안입니다.

류블랴나를 관통하는 작은 강 류블랴니카와 강을 건너는 다리들
마을 건너 산 꼭대기에서 펄럭이는 슬로베니아의 국기. 오늘의 목표인 류블랴나 성입니다.
귀염 상콤한 테디베어를 지나
경사가 지기 시작하는 마을 길
구비구비 골목길을 올라
산길을 본격적으로 올라가면
'짠'하고 성이 보입니다


표를 끊고 성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정원이 보입니다. 생각보다 성이 크지 않아 성 벽을 따라 2~3분 정도 걸으면 한 바퀴를 다 돌 정도로 보입니다. 성 내부를 돌면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건 작은 감옥들입니다. 노천 감옥은 하늘이 뻥 뚫린 깊은 구덩이에 죄수를 채워 넣도록 구성되어 있고, 귀족용 감옥은 타워 밑바닥에 있어 갇혀 지내던 귀족이 남긴 낙서가 그대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최소한의 용변을 해결할 공간도 없는 구렁텅이에 온갖 날씨에 그대로 노출되어 지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을 공간입니다. 성 내부에는 형벌이 근대화되면서 죄수를 교도 하고 갱생하기 위한 근대식 감옥도 보입니다. 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중세식 감옥이 사용되었다니 시간 감각에 조금 위화감이 듭니다. 감옥 바로 옆에는 채플이 있는데 여기서 기도를 드리며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성 내부에는 몇 개의 타워가 있는데 그중 가장 높은 타워에 올라가니 마을 전경이 확 눈에 들어옵니다. 해발 400미터 높이라고 하는데, 맑은 날에는 슬로베니아의 삼 분의 일이 보인 다고 하니 새삼 작은 국가구나 생각해봅니다.

한 눈에 보는 류블랴나 성의 모습
정말 아무것도 없는 노천 감옥
영화에서 보던 중세 감옥의 현실은 생각보다 더 끔찍합니다
20세기 초까지 사용되던 감옥입니다. 외견이 조선시대 감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감옥 바로 옆에 위치한 채플. 고문당하는 수감자들의 비명을 곁에 두고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요?
류블랴냐 성에서 한껏 들뜬 아저씨(1)
깃발이 보이던 타워에 올라가면
이렇게 성 내부도 볼 수 있고
선명한 다홍색으로 물든 류블랴나의 전경도 볼 수 있습니다

성 구경을 마치고 산을 내려와 시내 길을 걷습니다. 아담한 타운 홀을 지나 성 니콜라스 대성당으로 향하는데 마을이 시끌벅적합니다. 성당 뒤편에 마당에는 간이 부스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한쪽에서는 기념품들을 한쪽에서는 먹을 것들을 팔고 있습니다. 아마 무슨 축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옆을 지나가면서 맡는 고기 냄새가 주린 배를 자극합니다. 철판에 소고기를 뭉텅이로 놓고 굽는데 뿜어져 나오는 연기에서 냄새가 장난이 아닙니다. 부스를 요리조리 살펴보니 각종 고기 요리, 피자, 치킨, 덤플링, 중화요리, 크로켓에 디저트, 술까지 다양한 음식들을 팔고 있습니다. 마침 점심 때도 됐겠다 저는 가장 강렬한 향을 내뿜던 바비큐를 사서 먹습니다. 들썩하고 분주한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자니 괜히 저도 들뜨는 것 같습니다. 에라 기분이다 이것저것 사 먹다 보니 꽤 많은 돈을 써버립니다. 역시 축제는 무서운 친구입니다.

축제가 한창인 마을
색색의 햄버거도 좋고
꼬치 요리도 좋고
치킨도 좋고
피자도 좋습니다만
역시 바비큐가 제일입니다
챱챱해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신기한 광경

즐거운 오후의 한 때를 보내고 류블랴니카 강을 따라서 가볍게 걸어갑니다. 너비가 넓지 않은 류블랴니카에는 작은 관광용 배들이 지나다니는데, 선상 연주와 함께 사람들이 흥겹게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니 참 한가로운 풍경입니다. 강에는 용의 다리, 도살자의 다리처럼 이름이 붙어있는 다리들이 많은데 각 다리마다 기묘한 동상들이 많이 보입니다. 강가를 따라 걸으며 재미난 동상들을 찾아 재밌는 사진들을 찍어봅니다. 강가를 따라 내려오는 길에는 류블랴나의 여러 성당들, 도서관, 대학 건물 등을 구경합니다. 특별히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유명한 관광지도 아닙니다만 소소하게 구경 다니는 것이 마냥 좋은 하루입니다. 분명 날씨가 좋기 때문일 겁니다.

유유자적합니다
류블랴나의 상징 용의 다리입니다
도살자의 다리에서 한껏 들뜬 아저씨(2)
성을 배경으로 준비중인 축제 무대
도서관 구경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마지막 목적지인 제임스 성당까지 구경을 마쳤는데도 시간이 좀 남습니다. 근처에 더 볼 게 없나 찾다 보니 일루미네이션 박물관이 보입니다. 조금 작고 비싼 사설 박물관이 평점이 왜 좋을까 들어가 보니 이것저것 신기한 볼거리가 많습니다. 특히 착시와 관련하여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여러 어트랙션들을 꾸며놓았는데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혼자 이 사진 저 사진 찍어봅니다. 삼각대에 타이머로 사진을 맞춰놓고 마구 달려가서 포즈 잡고 찍힌 사진 확인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고, 평소라면 분명 귀찮아서 대충 넘어갔을 일입니다만 입에서 웃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혼자서 무엇이 신났는지 깔깔대며 괴상한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을 본다면 '저 사람 좀 많이 신나신 모양이다.'라고 분명 누군가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한껏 들뜬 아저씨(3)
이 한 컷을 위해 노오오력을 다한 아저씨(4)

숙소에 들어와서 글을 적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방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호스텔에 10인실 방을 쓰고 있는데, 어제도, 오늘도 사람이 들어오질 않습니다. 이렇게 큰 방을 저 혼자 전세를 내서 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자니 오늘은 소소한 것조차도 계속 잘 되는 날들인가 싶습니다. 당분간은 계속 이런 날들이면 좋겠다고 살짝 욕심을 내보는 류블랴나의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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