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24일 차, 자그레브

박물관들이 잊히지 않을 자그레브입니다

by 현준

아침에 눈을 떠서 뉴스를 뒤적거리는데 끔찍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유럽에 폭염이 쏟아진다는 기사입니다. 파리는 42도가 넘고, 유럽 각 국가별로 기록적인 폭염이 온다는 기사입니다. 어제도 상당히 더운 날씨였는데 돌아다니기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너무 걱정이 됩니다. 이런 날씨에 굳이 돌아다녀야 싶다가도 마음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옮겨보기로 합니다. 하루를 허투루 보내기엔 시간이 많이 아쉽습니다.


“지옥이 다가오고 있다”… 벌써부터 폭염에 시달리는 유럽, 국민일보, 6월 27일,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

오늘은 어제 어퍼타운을 돌면서 눈여겨본 박물관들과 로어타운을 돌아다닐 예정입니다.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어퍼타운으로 계단길을 따라 올라가 보면 장터가 펼쳐져 있습니다. 어제는 마감 시간인 오후 세 시가 지나 빈 공터만 보였던 돌라체 시장입니다. 아담한 규모의 시장에 펼쳐진 가판대에서는 과일, 꽃, 수제 공예품 같은 것들을 팔고 있습니다. 기념품들이 귀여워서 하나 살까 싶지만 제가 쿠나 화폐를 따로 환전하지 않고 카드만 쓰고 있기 때문에, 현금이 없어 살 수 있는 물건이 없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계속 갈 길을 갑니다.

돌라체 시장의 풍경

오전에 들른 첫 장소는 이별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입니다. 박물관 입구에 가위로 잘라낸 듯한 박물관 표지가 인상적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별을 전시하는 걸까 깊은 호기심에 입구에 들어섭니다. 이별을 단순히 관계를 파괴적으로 끝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별한 사람들이 소장하고 있던 물품들을 기증받아 다양한 사연들을 관람객들과 공유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기를 바란다는 취지로 박물관을 만들었다는 소개가 인상적입니다. 박물관에는 전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기증받은 물건들과 각 물건들에 대한 사연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별의 슬픔, 안타까움, 괴로움, 아픔, 추잡함, 당혹스러움, 고통, 그리고 통쾌함까지 감정들을 선명하게 드러낸 이야기들이 많이 보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나가는 과정이 꼭 강렬한 단편소설집을 읽어나가는 느낌입니다. 너무 소중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작품 하나하나 사진을 찍고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갑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인 'Reel-to-reel tape recorder and audio tape' 이야기를 번역해서 남깁니다.


1968년, 정확히 50년 전에, 나의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 겨우 한 살 남짓이었다.

우리 가족의 신사 제단에는 항상 단단히 봉인된 패키지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패키지를 열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주의를 주셨다. 내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머니는 그 녹음기에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녹음한 목소리가 담겨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녹음기를 봉인한 이유는 당신이 어릴 적 본 이탈리아 영화 때문이었다. 그 영화에는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년이 발견한 녹음기에서 사랑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장면이 있었다. 그 소년은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테이프를 돌리고 또 돌린 끝에, 테이프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영화를 보고 큰 충격을 받으시고는 영화에서의 비극이 어머니의 테이프에서 재현되지 않도록 조심히 포장해서 신사에 보관해 놓으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를 속박하는 주문에서 자유로워질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문기술가에게 가서 이제는 고물이 되어버린 오픈 릴식의 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을까 물어보았다.

테이프에선 어머니와 아버지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목소리는 나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응원하고 독려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노래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 50년의 인연, 도쿄, 재팬

이별 박물관, 혹은 실연 박물관.
50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녹음 된 테이프. 50년간 지켜온 비밀의 연을 이제 놓아줄 때가 된겁니다.
천국으로 떠난 아들을 위해 친구들이 낙서를 남긴 문입니다.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합니다.
때로는 관계 그 자체가 아픔의 원인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별 박물관을 나서서는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주변에 식당은 많이 보이지만 오늘 따라서 유달리 맛있는 점심이 당깁니다. 돌라체 시장 근처의 별점이 높은 식당에 가서 자리 잡고 메뉴판을 보는데 cevap이라는 메뉴가 보입니다. 케밥이라고 생각한 저는 비터 레몬 맛 탄산 과일주와 함께 메뉴를 주문합니다. 그런데 나온 메뉴가 좀 두툼하고 질긴 떡갈비 같습니다. 찾아보니까 cevap은 체바피라는 메뉴로 동유럽에서 즐겨먹는 다진 쇠고기 구이라고 합니다. 감자튀김, 생양파와 함께 나온 체바피는 조금 짜긴 하지만 확실히 맛있습니다. 특히 소고기의 육즙에서 나오는 풍미가 장난이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점심 메뉴의 성공에 작은 쾌조를 지릅니다. 식당을 나설 적에는 팁을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카드로 계산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몰라 머뭇거리다가 그냥 나오는데 웨이터가 살짝 불러 세웠다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그냥 가라고 하는 게 팁 관련하여 제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떡갈비보다 질기고 짭쪼름합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로어타운으로 향합니다. 언덕 위에 있는 어퍼타운과는 달리 로어타운은 공원 길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제 기차역에서 호스텔을 따라 올라왔던 바로 그 길입니다. 어쨌든 공원을 따라 걸어가야 하는데, 날씨가 진짜 덥습니다. 공원 한가운데 역사적으로 오래된 기상관측기구가 세워져 있는데, 수은주가 가리키는 온도를 보니 34도입니다. 이대로 계속 걸어 다니면 열사병에 걸려 쓰러질 것 같습니다. 더 걷는 것을 포기하고 근처에 가까운 박물관을 찾아보니 'IMAGE OF WAR, PHOTOGRAPHY MUSEUM'이 보입니다. 다행히 공원 근처로 공공 WIFI가 잘 되어 있어 무사히 길을 찾아갑니다.

솔직히 이런 날은 걷고 싶지 않습니다.
고생 끝에 전쟁 이미지 박물관 도착.


전쟁 이미지 박물관은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일반 가정집을 개조하여 만든 듯합니다. 소셜 크라우드 펀딩으로 만들어진 작은 박물관으로 1991년부터 95년까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전쟁을 겪었던 크로아티아군의 입장에서, 또 침공 국인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입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중립적인 시선에서 보여줍니다. 어떤 사진은 정복 군의 위상과 기쁨, 또 포로의 시체를 밟고 자랑스럽게 웃는 사진을, 어떤 사진은 참혹하게 처형당한 시체와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진을, 어떤 사진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어떤 사진은 전쟁터에서 마냥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을, 어떤 사진은 사진사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까지 찍고 있던 사진을... 전쟁에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본 전쟁의 모습에는 참혹함 밖에 남지 않습니다. 참혹함으로부터 교훈을 얻길 바라는 박물관의 의도는 너무나도 가슴속에 깊이 와 닿습니다. 특히나 세계사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전쟁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스스로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신기하게도 한국어로도 설명이 적혀져 있습니다. 전리품처럼 시체를 밟고 있는 사진의 충격은 잊히지가 않습니다.

오후에 남은 시간에는 로어 타운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돌아다닙니다. 중간에 고고학 박물관, 역사박물관, 크로아티아 국립 극장, 자그레브 대학교 등 수많은 박물관과 볼거리가 있지만 도저히 볼 기력이 나지 않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제가 유명한 미술, 역사박물관보다도 현대적인 박물관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서 의욕이 나지 않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날씨가 너무 더워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큽니다. 워킹 투어 루트를 따라 돌면서 간단하게 눈으로 구경하고 에어컨이 있는 호스텔로 돌아옵니다.


오늘도 호스텔 공용공간에 앉아 글을 적으며 하루를 정리하고 있는데 한국어 대화 소리가 들립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분과 여자분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작성하던 글을 잠시 접고 대화에 끼어 같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혼자 여행하시던 두 분에게서 여행의 재미있는 팁과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한 분은 런던에서, 한 분은 파리에서 유학을 다니셨는데, 두 곳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내일 슬로베니아로 떠나는 저와 달리, 두 분은 두브로브니크로 가신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 여행의 꽃이지만 저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합니다. 오래간만에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짓는 자그레브의 하루입니다.

오늘 나눈 이야기중에 '펍 크롤' 문화에 관심이 갑니다. 일정 비용을 내면 그룹지어서 네다섯 개의 펍을 돌며 한 잔씩 마시는 이벤트라고 합니다. 조금은 호기심이 갑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