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잠에서 일어나니 좀 춥습니다. 에어컨을 워낙에 강하게 틀어놓았기 때문인지 방이 춥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에어컨을 강하게 트는 방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의 방은 에어컨이 있으면 감지덕지인 수준이었으니까요. 자그레브의 호스텔에서 지낸 이틀이 너무나 편했기 때문에 그냥 눌러앉고 싶습니다. 가뜩이나 오늘은 36도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계를 쳐다보지만 벌써 야박한 체크아웃 시간이 코앞입니다. 호스텔 문 밖으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에 벌써 진득한 더운 공기가 느껴집니다.
체크아웃 시간에 쫓겨 나왔습니다만 출발 기차가 오후 12시 반 기차라 비는 시간이 생깁니다.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남는 쿠나를 처리하는 일입니다. 동유럽 국가를 돌면서 느낀 불편한 점 중 하나는 유로화를 쓰는 국가가 많지 않아서 각 국가를 들어갈 때마다 환전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그레브에서는 굳이 화폐를 쓰기보다는 카드를 주로 쓰고, 꼭 필요한 잔돈만 사용하기 위해서 헝가리에서 쓰고 남은 포린트 약간만 쿠나로 바꿔두었습니다. 이천 원 정도 해당하는 남은 돈 10 쿠나를 포스트 카드 하나와 빵 하나로 바꾸어 먹고 대충 돈을 다 털어버립니다. 이제 여행비를 알뜰하게 쓰는 법이 몸에 밴 모양입니다.
빵집에서 빵 하나 집어먹으면 천 원 정도로 아침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시간을 때우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동네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는 거지만, 이렇게 더운 날에 돌아다니다간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구글 맵을 켜고 근처에 평점이 좋은 카페를 찾아봅니다. 4.5점이라는 흔치 않은 점수를 받은 디자인이 예쁜 작은 카페가 보입니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골목의 작은 카페 느낌인데, 개점시간이 막 지나 손님이 아무도 없는 것이 마치 비밀공간에 온 느낌입니다. 메뉴판을 보니 사과와 오랜지가 들어간 스무디가 보여서 바로 주문합니다. 주문을 받자마자 생과일을 뭉텅뭉텅 썰어서 믹서기에 갈아서 주시는데, 제가 아는 스무디보다 훨씬 걸쭉하고 진한 맛이 납니다. 얼음 함량이 거의 없어서인지 걸쭉한 반죽을 그대로 들이키는 느낌입니다. 와이파이와 함께 한 때의 여유를 느끼며 더위를 피하고 있자니 오래간만에 여유로운 느낌입니다.
아담한 크기의 감각적인 카페
거의 반죽에 가까운 스무디. 원액에 가까운 진득한 맛이 인상적입니다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슬슬 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음료값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트러블이 발생합니다. 가게에서 카드를 받지 않고 오직 캐시만 받는다고 합니다. 영세한 카페라서 그런지 카드를 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모든 카페에서 신용카드를 받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패착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게에 들어서기 전에 비자카드를 받는지 꼼꼼히 체크했었는데 아무래도 어느 순간에 마음을 놓아버린 모양입니다. 카페에 들어서기 전에 현금을 전부 털어버렸기 때문에 계산할 수단이 없어 당혹스럽습니다.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근처에 ATM에서 돈을 뽑으면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저는 돈을 뽑아올 때까지 캐리어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며 황급히 ATM으로 달려가 출금을 해봅니다. 시간도 없고 당황스러운데 유럽에서 ATM을 처음 써보는지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 헛된 손짓을 반복합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사용방법을 알아냅니다만, 현금 인출 최소 금액이 200쿠나(3만 5천원)인걸 확인합니다. 이제 곧 크로아티아를 뜨는데 저 돈 다 사용도 못할 것을 꼭 뽑아야 하는지 망설여집니다만 방법이 없습니다. 눈 딱 감고 출금을 하니까 제 계좌에서 4만 2천 원이 빠져나갔다는 알람이 옵니다. 무려 출금액에 20프로에 해당하는 7천 원이 출금 수수료로 빠져나간 겁니다. 카페로 돌아가 겨우 계산을 마치고 남은 170쿠나는 환전소를 찾아 유로로 다시 바꿔서 가져갑니다. 고작 5천 원짜리 스무디 하나를 먹자고 출금 수수료, 환전 수수료로 8천 원 가까운 돈을 낭비한 셈입니다. 게다가 허둥지둥 대며 들인 수고를 생각하니 영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날도 더운데 짜증이 몰려옵니다.
언어의 장벽에 ATM 사용법을 알아내는 데 제법 고생합니다
결국 환전소를 또 찾아가다니
맥도널드에서 점심을 먹고 기차역에 도착하니 벌써 류블랴나로 가는 기차가 플랫폼에 서 있습니다. 크로아티아로 넘어올 때 탔던 기차와 완전히 동일한 모델입니다. 1등석이 여섯 좌석 짜리 방으로 이루어진 것도, 사람이 없어서 혼자 독점하는 것도, 와이파이가 없는 것까지 똑같습니다. 단 하나, 에어컨이 없는 것만 빼면 말입니다.
맥도널드 키오스크는 전세계 공통인 모양입니다
출발 전 키오스크에 경찰이 들이닥치는 신기한 장면도 구경합니다
아니, 기차에 에어컨이 없습니다. 밖의 온도는 36도입니다. 기차의 유일한 냉방 방법은 창문의 열린 틈새로 기차가 달릴 때 들어오는 바람의 순환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도 창문이 위쪽으로 얕게 열려있어 바람도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자니 무슨 건식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느낌입니다. 특히 국경을 넘어가는 곳에선 30분가량 정차해서 멈춰있어 그나마의 바람도 쐬지 못합니다. 땀에 절어서 지쳐있는 제 모습이 원체 초라해 보였는지, 검문하시는 분이 여권 사진 속의 그 인물이 맞는지 살짝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저는 의심이고 자시고 빨리 도장 찍고 기차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립니다. 진짜 너무 더운 하루입니다.
에어컨이 없는 불지옥 기차칸
세 시간 정도를 이동하여 도착한 류블랴나의 플랫폼은 별 감흥이 없습니다. 감상은 내일로 미루고 빨리 호스텔로 향합니다. 다행히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숙소가 있습니다. 숙소에 도착해서 리셉션 스탭에게 너무 더운 날이라 돌아다니기 힘들다고 불평하니 유럽이 이렇게 더울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마냥 웃습니다. 당장에 방에 들어가서 찬 물로 샤워를 하고 그동안 밀린 빨래를 돌립니다. 오늘은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그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합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방에서조차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 게 느껴집니다. 나가지 않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다행히 내일 기온은 27도까지 떨어지다고 하니 내일의 저에게 재밌는 여행을 양보하는 류블랴나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