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23일 차, 자그레브

세련된 도시미에 반한 자그레브입니다

by 현준

새벽부터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립니다. 알람을 확인하고 끄기를 세 번쯤 반복하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납니다. 다행히 새벽 다섯 시입니다. 어제 사온 빵을 입에 쑤셔 넣으면서 풀어헤친 짐들을 정리합니다. 6시 40분 기차를 놓치면 9시간 뒤에나 기차를 탈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야 합니다.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역에 도착하니까 기차가 벌써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1000 포린트 정도 남은 헝가리 돈을 다 털어내고 싶지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탑승한 기차가 탑승하자마자 출발하는 것을 보고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부다페스트에서 크로아티아로 가는 기차는 좀 많이 낡은 느낌입니다. 철제로 된 문이 삐그덕 거리며 잘 맞물리지 않습니다. 기차 칸마다 배치된 화장실은 X 표시와 함께 이용이 불가능한 곳이 많이 보입니다.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 기차 몇 칸을 넘어 다니는데 좀처럼 이용 가능한 화장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차 칸들을 건너 다니며 다른 방을 살펴보는데 탑승한 승객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탄 6인실 1등석 방도 저 혼자 독점합니다. 언제 사람이 탈 지 몰라서 드러눕고 싶은 것도 꾹 참고 꼿꼿이 앉아서 갑니다만 도무지 사람이 보일 기미가 없습니다.

20190625_064506.jpg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일등석 6인실 방. 혼자 쓴건 좋은데 여전히 편한 여정은 아니었습니다.


기차를 타는 시간이 6시간이나 되다 보니 기차 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좀처럼 심심할 수가 없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졸리기도 하고, 써야 하는 글도 있고 해서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다가 잠들기를 반복합니다. 멀미 기운이 좀 있어서인지 글 쓰는 것도 힘들고 와이파이도 없어서 딱히 볼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한 세 시간 정도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기차가 정지하더니 한참을 가지 않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당황해하고 있는데 곧 경찰들이 와서 여권을 요구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당황해하며 여권을 보여주는데 여권을 한 번 훑어보더니 스탬프를 꺼내 사증에 도장을 찍습니다. 그러고 곧바로 다른 사람이 똑같은 절차를 반복하더니 스탬프를 하나 더 찍습니다. 생각해보니 정차한 곳이 딱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경인 모양입니다. 그동안 넘나든 국경은 쉥겐조약에 가입한 국가들 간의 국경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검사 절차가 없었던 반면, 크로아티아는 쉥겐조약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사이에선 검문이 있는 모양입니다. 기차에 경찰들이 다니는 모습이 꼭 무슨 사건이 터진 것 같아서 국경 검문인 것을 아는데도 괜히 또 긴장이 됩니다. 다행히 크게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국경을 넘은 이후로 스마트폰이 데이터를 더 이상 잡지 못합니다. 통신사는 잘 잡았는데 왜 데이터는 사용이 안 되는 걸까 생각해보니, 제가 사용하는 EE 유심칩이 지원하는 국가에 크로아티아가 포함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당장 인터넷이 안되니 그나마 시간을 죽이던 웹서핑도 못하는 건 둘째 치고, 제가 가는 호스텔 이름도 주소도 모르고 알아낼 방법도 전무한 상황에 빠집니다. 미리 인터넷이 끊길걸 알고 있었다면 구글 지도를 오프라인 용으로 다운로드하고 가는 길이나 주소, 환전 등 중요한 정보를 챙겨놓았을 텐데 생각지도 못하게 인터넷이 끊기니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두 시간 동안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불안감과 초조함에 답답한 시간만 보냅니다. 여행에서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얼마나 소중한 도구인지 새삼 느끼는 순간입니다.


6시간을 걸려서 도착한 자그레브는 매우 친숙한 느낌입니다. 지금까지 봐왔던 유럽 국가들은 딱 유럽이라고 느낄만한 옛날 건축물들이 많았는데, 자그레브는 친숙한 현대 도시의 느낌이 납니다. 음식점과 카페의 인테리어나 건물 다자인 등이 우리나라에서 보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길거리에 이정표가 세세하게 세워져 있는데 이렇게 꼼꼼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이정표는 살면서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특히 공공 와이파이를 제법 많은 곳에서 제공해서 필요한 정보 등을 찾기에 인터넷 활용이 편한 느낌입니다. 당장에 숙소는 찾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풀어집니다.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스텔에 도착하니 프레임처럼 아늑하게 분리된 침실, 방탈출 카페 같이 시각적 임팩트를 주는 디자인이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이 정도면 그냥 여기서 한동안 생활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첫인상이 좋습니다.

20190625_125827.jpg 생각보다 더 깔끔한 중앙 공원. 마침 클래식 음악회가 있는 모양입니다.
20190625_140112.jpg 호스텔 도미토리 룸. 일박 만 오천원 정도에 이렇게 좋은 방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20190625_135019.jpg 의외로 곳곳에서 한국어를 볼 수 있어 놀라웠던 자그레브.
20190625_153718.jpg 이정표가 잘 되있어서 길을 잃을래야 잃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와이파이가 생각보다 잘 터져서 놀랐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기차를 타면서 쌓인 피로도 있고, 호스텔 방에 도착하면서 긴장도 풀리면서 숙소에서 조금 쉬고 싶습니다만, 제가 자그레브에 머무르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한 시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근처 볼거리들을 가볍게 둘러보러 가기로 합니다. 리셉션에서 볼만한 곳들을 추천받으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한국어로 된 도보 투어 안내 책자가 보입니다. 덜썩 집어 들어서 챙겨가지고는 그대로 광장으로 나가봅니다. 길을 걸어가며 책자를 살펴보니 반 옐라치츠 광장을 중심으로 북쪽에 어퍼타운, 남쪽에 로어타운 지구로 나누어집니다. 오늘은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책자에 나온 워킹 투어 루트를 따라 어퍼타운 일대를 걸어보기로 합니다. 어퍼타운은 광장을 중심으로 북쪽 언덕지대에 구성된 일대로, 광장에서 경사를 따라 올라가거나 어퍼타운으로 올라가는 아담한 푸니쿨라(리프트)를 타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푸니쿨라를 타기에는 돈도 조금 아쉽고 주변에 걸으면서 볼 것도 많으니 구경을 하면서 천천히 걸어 올라가기로 합니다.

20190625_180720.jpg 옐라치츠 광장에서 어퍼타운으로 오르내리는 작은 푸니쿨라. 가정집들 사이로 운행되는 게 귀엽게 보입니다.

처음 시작은 반 옐라치츠 광장입니다. 넓게 탁 트인 광장 한가운데 옐라치츠 부짐스키 백작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동상 앞에 넓게 트인 공터에는 사람도 많고 비둘기도 특히 많았는데, 비둘기 모이를 주는 사람이 모이를 뿌리자 정말 새떼가 몰려오는 느낌입니다. 유럽에 와서 비둘기가 어디에도 있고 많이 보인다는 느낌이었지만, 사람이 있든 없든 신경도 쓰지 않고 날아드는 비둘기들을 보니 좀 무섭다는 느낌이 듭니다.

20190625_153819.jpg 옐라치츠 광장의 상징인 옐라치츠 부짐스키 백작의 동상
20190625_134843.jpg 광장을 수놓는 비둘기떼의 습격


반 옐라치츠 광장 동쪽에서 어퍼타운으로 올라가는 시작 길에는 자그레브의 가장 큰 성당인 캅톨이 보입니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두 개의 탑이 솟아있는 성모승천 대성당이 보입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하얀 대리석이 인상 깊습니다. 성당 중앙에는 으리으리한 관에 사람 모형이 누워있는데 자세한 사정을 몰라 그냥 걸어 나옵니다. 아마도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성해를 모셔놓은 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당을 나오자 강렬한 햇빛과 함께 성모 마리아와 천사상이 저를 맞이해주는데, 오늘따라 햇볕이 너무 강해서 쳐다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20190625_154852.jpg 아쉽게도 캅톨의 한쪽 타워 일부가 수리중입니다
20190626_211112.jpg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쳐다보기도 힘들었던 성모 상

이후 어퍼타운을 요리조리 돌아다니는 길은 제법 재밌습니다. 몇몇 동유럽 국가들에서 본 슬럼화 된 모습들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서유럽처럼 거대한 건축물들이 마구 들어서 있는 편도 아닙니다. 다소 (서유럽 입장에서) 아기자기한 집들이 늘어서 있는 게 꼭 현대 동화 속 세상을 걷는 느낌입니다. 도심 곳곳에 숨어있는 블러디 브릿지, 라디체바, 스톤 게이트 같은 관광명소들을 돌면서 부지런히 걸어 다닙니다. 걸어 다니다 보니 벽 사이로 작은 터널 같은 게 보입니다. 무슨 공사장 같은 곳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콘크리트로 된 터널 같은 통로가 보입니다. Turnel Gric이라고 부르는데, 어퍼타운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통로인 듯합니다. 입구가 건물 속에 묻혀있어서 지하수 하수도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저도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통로를 걷고 있자니 레지스탕스의 비밀 통로를 걷고 있는 기분입니다. 콘크리트로 밀폐되어서 물이 고여있는 통로는 조금 퀴퀴한 느낌이지만 매우 시원합니다. 밖의 더운 날씨를 생각하면 여기서 피서라도 하고 싶습니다.

20190625_162021.jpg 상당히 감각적인 도시 분위기
20190625_162536.jpg 피자가 맛있어보이는 거리입니다
20190625_164224.jpg Turnel Gric으로 들어가는 통로
20190625_163638.jpg 꼭 하수도를 통과하는 것 같아 흥미진진합니다

어퍼타운의 중심지에 도달하니 경찰과 군인들이 막 몰려있습니다. 주위에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계속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면에는 모자이크 양식으로 알록달록하게 지붕이 꾸며진 세인트 마르크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 앞에 경찰과 군인들이 몰려있는 게 무슨 행사나 내빈 방문 같은 게 있나 싶어 물어보니, 성당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의회와 총리궁이 각각 있다고 합니다. 총리 궁과 의회가 일반 건물들 사이에 평범하게 있는 것도 신기한데 그 한가운데 성당이 서 있다니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지, 어떤 역사적 유래가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성당 앞 광장에 경찰, 군인, 정치인, 학생, 예배를 드리러 온 종교인, 랜드마크를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까지 섞여 있는 모습은 꽤 흥미로운 광경입니다.

20190625_172010.jpg 크로아티아 문양의 모자이크 장식이 인상적인 세인트 마르크 광장
20190625_172843.jpg 양옆으로 총리 궁과 의회가 있어서 업무를 마치고 나오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퍼타운 구경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되니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 슬슬 배가 고파옵니다.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 따라가니 카타리나 광장에서 길거리 음식들을 파는 모습이 보입니다. 크로아티아에 머무르는 3일간 크로아티아의 현금인 쿠나를 따로 환전하기보단 신용카드를 사용하기로 해서 아깝게도 길거리 음식은 지나칩니다. 대신 광장에서 시작하는 스트로스마이어 산책로를 따라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자그레브 시내의 전경을 구경합니다. 산책로는 예쁜 가로수 길인데 곳곳에 사진 찍기 좋은 스팟들이 있습니다. 시인 A. G. 마토슈가 벤치에 앉아 있는 다소 기묘한 조각상에서, 그가 외롭지 않도록 사진을 같이 한 장 찍고 내려옵니다.

20190625_174739.jpg 어퍼타운에서 내려보는 색채가 뚜렷한 자그레브의 모습
20190625_175758.jpg 스트로스마이어 산책로와 길거리 음식점들
20190625_180535.jpg 산책로 길에 놓여 있는 시인 A. G. 마토슈의 동상

어퍼타운을 한 바뀌 돌고 내려오니 다시 반 옐라치츠 광장이 보입니다. 광장 한 편에는 Muller라는 대형 쇼핑몰이 보입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본 기억이 있는 것이, 동유럽 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형 마트인 듯합니다. 땡볕에 돌아다니느라 지쳤기 때문에, 간단한 먹을 것과 함께 물을 잔뜩 사서 숙소로 들어갑니다. 간단하게 씻고 수기를 써 내려가며 몸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스르르 잠이 드는 자그레브의 하루입니다.

20190625_225833.jpg 오는도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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