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 35일 차, 뉘른베르크

뜻밖의 여정, 뉘른베르크입니다

by 현준

오늘은 원래 베르히테스가덴을 갈 생각이었습니다. 베르히테스가덴의 광활한 산길을 걸으며 자연을 느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계획을 세우다 보니 난관에 봉착합니다. 뮌헨에서 베르히테스가덴으로 가는 기차 딱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8시간 동안 타고 가는 밤 기차와 3시간 정도 타고 오후 6시에 도착하는 기차입니다. 물론 버스와 기차를 두세 번 정도 갈아타면서 세 시간 정도 만에 어떻게든 도착하는 루트도 있습니다만 그나마도 돌아오는 방법이 너무 복잡해서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차라리 잘츠부르크에서 베르히테스가덴을 거쳐 뮌헨을 왔다면 좋았겠지만은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비슷한 거리라면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로텐부르크가 있는데 굳이 무리를 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로텐부르크로 행선지를 정하고 출발해봅니다.

20190707_093025.jpg 아침 길거리 풍경이 어디 멀리 가고 싶어 지지 않은 풍경입니다


로텐부르크로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은 세 차례 환승이 필요합니다. 시간으로는 세 시간 정도 걸리는데, 이체에를 타고 가는 길에 막상 생각해보니 뮌헨으로 다시 돌아오는 왕복 일정까지 모두 여섯 시간의 당일치기 일정은 이동만으로도 꽤 힘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문득 로텐부르크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다시 깊은 고민에 빠져듭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첫 환승 역인 뉘른베르크를 둘러보면 어떨까 생각을 바꾸어 봅니다. 당장 스마트폰을 꺼내서 곧장 뉘른베르크가 어떤 동네인지 검색을 해봅니다. 관광지로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특히 장난감 관련 이야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뉘른베르크는 꼴랑 뮌헨에서 한 시간 거리기 때문에 로텐부르크에 가는 만큼 시간적 부담도 덜합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저는 뉘른베르크로 오늘의 목적지를 결정합니다. 몇 번을 오락가락하던 오늘의 행선지는 뉘른베르크로 당첨입니다.

20190707_105433.jpg 반갑습니다, 뉘른베르크

뉘른베르크 역에서 내리자마자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보입니다. 곧장 성벽의 입구로 들어서니 꼭 크리스마스 상점가를 떠오르게 하는 오밀조밀하게 모인 기념품 가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설명을 읽어보니 수공예 장인들이 모여 작업하고 상품을 판매하는 수공예인의 거리라고 합니다. 가게들은 저마다 다양한 테마가 있어서 어떤 가게에서는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자동차 장난감이, 어떤 가게에서는 가죽 가방이, 또 어떤 가게에선 무쇠 조각으로 만든 육중한 조각상 등이 보입니다. 낡고 탁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기념품들은 마치 옛 향수를 떠오르게 하는 기분입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볼까 싶다가도 어릴 적의 향수는 이대로 남겨두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그냥 눈으로 훑고만 지나가기로 합니다.

20190707_113135.jpg 역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성벽과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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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입구 너머로 아기자기한 테마파크가 눈에 들어옵니다
20190707_113846.jpg 창 너머로 장난감들이 보이는군요
20190707_113902.jpg 옛날 자동차 모형들

성벽을 넘어서 도시 안으로 들어오니 확 트인 시야기 눈에 들어옵니다. 넓게 트인 도로에 행인들은 별로 없어서 길가가 훤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성벽에 둘러싸인 동네라 내부도 예스러운 투박함이 있으리라던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습니다. 도시의 건물들은 확실히 예스럽지만 너무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보니 중세의 도시가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마치 잘 가꾸어진 역사 드라마의 세트장에 기대치도 않았던 생활력이 가득한 기분이랄까요? 만약 동화 속 마을이 생동감을 가진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하늘은 맑고 날도 선선하니 돌아다니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겁니다.

20190707_114204.jpg 관문을 넘어서 성벽 내부는 풍경이 확 달라집니다
20190707_114243.jpg 확 풍경이 트이는 뉘른베르크
20190707_114312.jpg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를 둘러보는 것이 오늘의 (급작스럽게 결정된)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런 동화 속 마을 속에서 매우 이질적인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온통 유리로 이루어진 이 매우 현대적인 건축물은 신(新) 박물관입니다. 도대체 박물관의 테마가 무엇이길래 무려 박물관의 이름이 '새로운'인지 궁금하여 찾아보니, 현대 디자인 및 예술품에 대한 전시관이라고 합니다. 현대 디자인이라는 글귀를 보니 가슴에 팍 하고 꽂히는 게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클래식한 예술보다는 추상적인 현대 미술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는 모양입니다. 그동안 고전 미술 박물관만 다니면서 다소 지쳤던 예술 감성이 번뜩하는 기분입니다. 박물관 데스크와 로비부터 공간이 비대칭으로 비틀어진 것이 벌써부터 마음에 듭니다. 일요일에는 입장료를 1유로만 받는다고 하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20190707_114554.jpg 중세 마을에 이 이질적인 건축물은 무엇일까요
20190707_124540.jpg 프런트 데스크부터 위화감이 느껴지는 Neu 박물관
20190707_120446.jpg 박물관 건물 자체도 충분히 추상적인 예술 작품 같습니다

관람을 시작하고 나선 계단을 따라가며 전시관 입구가 어딘지 찾을 수 없어 기웃거리는데, 건물 구조가 특정한 입구는 없고 벽 틈 사이로 들어가야 전시실들이 나오는 걸 깨닫습니다. 건물 구조부터 비 직관적인데, 정신이 아늑해지는 전시물들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솟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러니가 연속되는 공간이 저는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고전 예술에 비해 난잡하고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현대 예술을 어렵기만 한 것, 지적 허세의 결정체, 유명세가 만든 헛소리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그 난해함이야 말로 의미의 틀을 깨버리면서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게 하는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예술 작품이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감탄과 경이로움을 자아내더라도, 그러한 감상들은 정형화된 진부한 감각들은 아닐까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현대 예술이 내포한 의미의 자유분방함은 해석의 보편화를 거부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더 많은 해석의 자유를 누리게 하므로 사람들이 매료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20190707_120955.jpg 공간에 아무렇게도 흩트려놓은 흥미로운 전시물
20190707_121338.jpg 문자들을 가지고 노는 이 기괴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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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더미와 컬러를 입은 옷 더미, 거울을 이용한 신박한 전시물
20190707_121847.jpg F문자 활용의 끝을 보고 싶은 의지가 느껴지는 방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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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탄광을 캐듯이 사체를 해체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한 섬뜩함을 불러옵니다

신 박물관에서 혼돈스러운 관람을 즐겼으니 이번에 클래식한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다음 행선지는 바로 게르만 국립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는 정문 길에는 하얀 문과 함께 문자가 새겨진 돌기둥들이 보입니다. 기둥에는 인권선언문 29항의 각 항들이 독일어를 비롯한 각국의 언어로 쓰여 있는 게 보입니다. 이 인권선언문은 나치가 패망 이후 이를 반성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대리석 원기둥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장들에서 비장감과 함께 공허함이 느껴집니다. 마치 고대 신화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신들이 엄중한 경고를 남기고 떠나 버린 풍경 같습니다. 과연 인권선언문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망각되는 일들은 아닌 지, 100년이고 200년이고 흘러도 이 자리에 그대로 서있을 것만 같은 문장들은 시대가 흘러서도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을지, 박물관에 들어서기 전부터 여러 생각에 잠시 숙연해집니다.

20190707_130633.jpg 게르만 국립 박물관 입구에 인권선언문이 시작되는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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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에는 여러 언어로 인권선언문의 각 조항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20190707_130433.jpg 인권선언문을 넘어 도달안 게르만 국립 박물관

게르만 국립 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20세기까지 게르만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거대한 박물관입니다. 이 세련된 전시관은 놀랍게도 각 전시관마다 시기에 맞게 공간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선사시대는 마치 무덤에 있는 것처럼, 고대 시대는 신전을 그대로 재현하고, 크리스천의 전시관은 성당 내부를 옮겨놓더니, 중세 전시관은 중세 성에 있는 것처럼 꾸며놓고, 근현대 전시관은 현대적 느낌이 나도록 전시관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재현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선선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고대와 중세 전시관의 시설 재현도가 너무 높아서 온도 조절이 안돼 매우 더울 정도입니다. 전시관 하나하나를 넘어갈 때마다 시대를 뛰어넘는 구성이, 꼭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선사시대부터 하나씩 역사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박물관에서 제공되는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본격적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구경하면 좋을 텐데, 한정된 시간으로 대충 훑고 지나가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20190707_140542.jpg 마치 성당에 들어온 듯한 전시관의 풍경
20190707_150535.jpg 모든 전시관을 이렇게 꾸미는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요?

정규 전시를 다 훑어보고 작은 규모의 특별 전시관을 열심히 살펴봅니다. 특히 'The adventure of research"라는 제목이 눈에 띄는데, 박물관에서 어떻게 유물들을 연구하는지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박물관이 소장하고 전시하는 물품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대부분 변함없이 전시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연구에 따른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게르만 국립 박물관을 운영한 지 200년이 다 되어가고 있고 그동안 박물관이 소장하게 된 유물들이 많지만, 아직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언제 만들어진 건지, 무엇에 쓰는 건지 밝혀지지 않은 유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연구 패러다임이 달라지거나 새로운 해석이 제시됨에 따라서 유물의 사용법을 새로 알게 되거나 유물의 가치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박물관 역사가 길다 보니 유물이 어떻게 박물관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경위를 추적하는 것 역시 중요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연구의 기반이 되는 패러다임과 생각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논의마저도 중요한 연구 거리입니다. 유물 연구와 큐레이션이 갖는 깊이에 대해서 생생하게 느끼는 즐거운 박물관 관람입니다.

20190707_132357.jpg 박물관 역사가 200년이 넘어가면 도대체 왜 이 유물이 박물관에 들어오게 되었는 지도 연구 대상이 되나 봅니다
20190707_132553.jpg 유물이 어떤 물건이었는지 집단지성의 힘을 빌리는 재밌는 모습
20190707_133334.jpg 회화의 성분분석과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과정도 흥미가 갑니다

난해한 박물관, 진지한 박물관을 구경했으니 재밌는 박물관도 가보고 싶습니다. 뉘른베르크를 구경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인 장난감 박물관을 가봅니다. 입구에서부터 즐비한 각종 놀이거리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테이블 축구, 보드 게임, 퍼즐, 레고, 게임 보이, 닌텐도 위, VR 게임기까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몰두해있는 모습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놀이에 삼매경인 사람들을 뒤로하고 전시관을 올라가 보니 여기는 말 그대로 장난감들의 세상입니다. 1800년대의 옛날 장난감부터 최근의 장난감까지 시대별로 전시 중입니다. 몇몇 장난감들은 버튼을 누르면 동작을 하는데 재미있어서 자꾸만 버튼을 눌러봅니다. 특히 레일을 따라서 움직이는 기차 장난감들은 어릴 적 즐겁게 가지고 놀던 기억 때문인지 마냥 반갑기만 합니다. 선로를 직접 설계하고 조립해서, 건전지가 들어간 기차가 그 선로를 따라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게 그렇게 좋았었는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니까 괜스레 눈물이 나오는 듯합니다. 아예 큰 방 하나를 털어서 족히 스무 대가 넘는 기차가 동작하는 대형 디오라마가 가장 관심이 갑니다만, 여러 사정으로 일주일에 딱 하루씩만 운행한다고 합니다. 만약 운이 좋아서 기차들이 칙칙폭폭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면 너무나 좋았을 텐데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20190707_165620.jpg 드디어 장난감 박물관에 도착
20190707_165336.jpg 전시관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놀이에 몰두한 모습에 입가에 웃음이 가시질 않습니다
20190707_160117.jpg 시대별 놀이의 역사
20190707_160400.jpg 이런 세트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아이들은 분명히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었을 겁니다
20190707_161132.jpg 만화경 비슷한 걸 가지고 놀았다는 건 좀 신기합니다
20190707_161531.jpg 어릴 적 너무 갖고 싶었던 과학상자 세트입니다. 이걸로 자동차 같은 걸 만드는 친구들 볼 때면 너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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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박물관의 하이라이트 초대형 철도 디오라마

박물관들을 쭉 둘러보고 남은 시간은 마을 산책을 다닙니다. 넓게 뚫린 길을 따라서 언덕을 오르고 또 올라 누렘버그 성을 정복합니다. 성벽에 올라 밖을 바라보니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작고 아담한 마을에 교회와 성당이 툭툭 튀어나온 풍경이 조금 익살스럽습니다. 성 내부도 구경할 수 있지만 이미 성벽에 오른 시간이 일과를 마무리할 시간이라 아쉽게도 포기하기로 합니다. 이미 마을 전경을 눈에 담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입니다. 뒤러 하우스를 비롯해서 몇몇 구경하지 못한 성당, 교회, 박물관들이 많습니다만 다시 찾을 언젠가를 기약해보기로 합니다. 왠지 다시 한번 찾아오게 될 것 같은, 마치 운명론적인 강한 직감을 받는 뉘른베르크의 하루입니다.

20190707_170203.jpg 이제 오늘 남은 일은 언덕을 오르는 일뿐입니다
20190707_170942.jpg 마을에 높은 건물은 성당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20190707_173928.jpg 시간이 부족해서 지나쳤던 풍경은 다음을 기약해봅니다
20190707_190453.jpg 돌아오는 기차에서 찍은 하늘마저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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