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시간에 맞추어 출발하기 위해 어젯밤 잠을 청하기 전에 오전 7시에 알람을 맞추었습니다만, 잠에서 일어나 보니 이미 7시 40분이 넘어 있습니다. 제시간에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늦어도 숙소에서 8시 10분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너무 푹 잠들었나 봅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늦게까지 글을 쓴다고 삽질을 하다 보니 요즘 피로가 계속 누적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시의 낭비도 없이 재빨리 씻고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합니다. 재빨리 U반을 타고 정류장에 내린 다음 중앙역을 찾아 뛰어가는데, 뮌헨에 체류한 5일 동안 매일같이 잘만 찾아가던 중앙역을 오늘 따라서 전혀 찾지 못합니다. 허둥지둥 대다가 결국 출구를 잘못 나와서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중앙역을 찾아 좌충우돌 합니다. 초단위로 타느냐 못 타느냐 아슬아슬한 시간싸움에서 간신히 플랫폼에 도착하고 보니, 벌써 차장이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대로 캐리어를 끌고 마지막 힘을 짜내 전력 질주를 합니다. 다행히도 제가 타는 것을 끝으로 차장이 출발 사인을 보내는 듯합니다. 기차에 타서는 몰아치는 숨에 헉헉거리며 겨우 가슴을 진정시킵니다. 아침부터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나라건 비슷비슷한 풍경의 지하철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며 향하는 목적지는 바로 프라이부르크입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의 프라이부르크를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생태도시로 소개하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기에, 여행을 처음 준비할 때부터 꼭 가고 싶은 리스트에 넣어 둔 도시입니다. 너무 환경이 좋아서 밤이면 박쥐마저 볼 수 있다는 프라이부르크를 기대하면서, 뮌헨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장장 네 시간을 달려갑니다. 제법 긴 이동 시간을 꾸벅꾸벅 졸다가 멀미하다가 다시 잠을 청하기를 반복하면서 힘들게 보냅니다.
도대체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는 비
드디어 도착한 프라이부르크는 계속 비가 내려서 그런지, 기차역에서 내리자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쌀쌀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기온을 확인해보니 채 20도에 못 미치는데, 얼마 전까지 40도가 되느니 마느니 하던 날씨였던 걸 생각하면 유럽의 여름은 참으로 변덕스럽단 생각이 듭니다. 숙소까지는 30분가량을 걸어가야 하는데 날이 춥고 비가 내리므로, 캐리어 속에 묻어 두었던 저지를 꺼내 입고 캐리어에 방수커버를 씌워 준비를 단단히 합니다.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도시, 프라이부르크. 그중엔 유명한 산맥인 '검은 숲'이 있습니다
프라이부르크는 환경의 도시로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많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 중앙역에 내려서 보이는 풍경에는 자동차 밖에 보이지 않아서 허풍이었을까 생각이 듭니다만, 중앙 대로를 벗어나자 자전거들이 무더기로 다니는 것을 보고 과연인가 봅니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전거를 줄지어 타고 가는 것이 보입니다. 차도든 인도든 포장도로가 거의 없는 반면에 자전거 도로만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신호에 맞추어 자전거들이 차량을 제치고 우르르 지나가는 모습은 확실히 신선한 풍경입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중앙역에서 드라이잠 강을 따라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길은, 마치 숲길을 걷는 듯한 기분입니다. 분명히 프라이부르크의 도심 한복판을 걷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도시 속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습니다. 번듯한 건물들도 계속 이어지고 콘크리트로 포장된 차도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풀숲에 우거져 있어 마치 처음부터 자연의 일부였던 것 마냥 느껴집니다. 제가 잡은 숙소인 BLACK FOREST HOSTEL은 프라이부르크의 명물 '검은 숲(Schwarzwald, 슈바르츠발트)'의 입구 부분에 위치하는 데, 검은 숲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더욱더 풀숲으로 우거져서, 도로 옆으로 서있는 집들이 마치 숲 속의 별장이나 펜션처럼 느껴집니다. 제 숙소 역시 가구 대부분이 목재로 이루어진 삼림욕장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고 시원한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신기한 곳입니다. 하지만 너무 자연 친화적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방이 습하고 막 세탁했다는 하얀 침구류조차 누렇게 떠 보여 위생이 좀 불안합니다. 아무래도 배드 버그나 각종 벌레에 시달릴 것만 같은 기분을 떨쳐버리기가 어렵습니다.
벌써부터 자연의 기운이 한가득해 보이는 호스텔, 정말 벌레가 없을까요?
자연친화적이라 WIFI 따위 제공하지 않는 비범함이 돋보입니다
체크인을 마치고 슈바르츠발트 스타디온으로 향합니다. 슈바르츠발트 스타디온은 검은 숲 구장이란 뜻의 이름 그대로 주변이 산림으로 둘러싸인 경기장입니다. 숲길을 따라 20 여분을 걸어가니 구장에 도착합니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프라이부르크를 연고로 하는 SC 프라이부르크 팀의 팬샵을 방문합니다. 팬샵이 문을 닫기 전에 서둘러 방문한 이유가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프라이부르크에 방문한다고 했더니, 마침 몇 주 전 정우영 선수와 권창훈 선수가 프라이부르크에 입단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특히 정우영 선수의 경우 인천 유스 출신으로 따지고 보면 제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데, 마침 제가 프라이부르크를 여행할 즈음에 타이밍 좋게 프라이부르크에 입단했다고 하니, 굿즈라도 하나 사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겁니다. 팬샵 직원에게 부탁해 정우영 선수의 이름이 마킹된 유니폼을 하나 구매하는데, 예전에 정우영 이름을 마킹한 사람이 있었냐고 물어보니, 온라인은 모르겠지만 직원이 자기 손으로 직접 마킹하는 건 처음이라면서 제게 축하한다고 인사해줍니다. JEONG을 어떻게 발음하냐고 물어보면서 직원이 자꾸 '예옹'이라고 발음하길래 제가 '정'으로 읽는다고 몇 번을 가르쳐줍니다. 마침 어제 시범경기에서 골도 넣었다면서 좋은 선수가 될 거라고 덕담도 해줍니다. 제가 축구를 자주 챙겨보진 않지만 귀국하면 정우영 경기는 꼭 챙겨봐야겠습니다.
숲길을 따라 걸으며
안개 낀 주택가를 지나
드디어 도착한 슈바르츠발트 스타디온
바로 팬샵으로 달려가서
드디어 구한 정우영의 유니폼. 스태프분이 친절하게 사진도 찍어주셨습니다
유니폼을 구매하고 나니 시간이 한참 흘렀습니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날도 살짝 어두워지는 기분입니다. 검은 숲에 방문할 계획은 접고 그 시간에 구시가지를 걸어보기로 합니다. 자갈돌로 포장된 구시가지 길을 걷다 보니 길바닥 곳곳에서 보이는 문양들이 신경 쓰입니다. 가게 앞마다 바닥에 사인이 그려져 있는데그 가게가 무슨 가게인지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문양들인 모양입니다. 신발가게면 신발 사인이, 보석 가게면 보석 사인이 그려져 있는 식으로 말입니다. 저는 그냥 걷기에는 조금 심심했기에 바닥을 보고 걸으며 문양만 보고 무슨 가게인지 맞추는 놀이를 해봅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한다는 자부심이 부질없게도 그렇게 많은 사인을 맞추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사인에 문화적, 역사적 의미를 포괄하는 맥락이 많다 보니 배경지식이 부족한 저한텐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인들을 모아 설명해주는 책이 있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구시가지로 가는 관문을 넘어서(저 관문으로 무려 트램이 지나다닙니다)
이렇게 가게 앞에는 무슨 가게인지 알려주는 사인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인만 보고 무슨 가게인지 유추하실 수 있나요?
막상 정답을 봐도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알기 어려운 사인들도 많더군요
시가지를 하염없이 산책하다 보니 시청 앞 광장에 벌여진 작은 무대가 보입니다. 무대에는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각각 관악기를 손질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실버 취주악단이 어떤 연주회를 열까 궁금한 마음에 발길을 멈추고 잠시 구경해보기로 합니다. 주변에는 술과 먹을거리를 파는 푸드트럭들이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들 마다 다들 뭐라도 하나씩 사 와서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저도 빈 손으로 앉아있을 순 없어 맥주 한 잔을 사 옵니다. GANTER라는 브랜드의 맥주로 콜라와 반반씩 섞은 잔을 시킵니다. 계산할 때 술값에서 2유로를 더 받길래 물어보니, 2유로는 보증금으로 맥주를 다 마시고 잔을 가지고 오면 돈을 돌려준다고 합니다. 아이디어 좋다고 생각하며 잔을 갖고 빈 테이블에 앉아 연주를 기다려봅니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기다리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자 분이 무대에 들어섭니다. 백발이 무성하지만 얼굴에 사뭇 진지한 표정이 감도는 어르신들이 무대 인사를 올립니다. 곧 시작한 어르신들의 연주는 어르신들의 경쾌한 몸짓과 어우러지는 유쾌한 곡입니다. 술에 흥이 오른 사람들이 환호하는 분위기가 부산하고 소란스러워서 마냥 즐겁습니다. 연주가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지휘자 분과 연주자 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잘했다는 손짓하고 웃음을 나누는 모습이 마냥 행복해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작은 성취에 서로 기뻐할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곱씹어 감상에 젖는 프라이부르크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