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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은희 Aug 23. 2021

맥주 한잔 하실래요?

1.

“오늘 회식이나 할까요?”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것도 하필 금요일 퇴근 시간에, 그것도 하필 지인들과 1박 2일로 여행을 가는 전날에. 그날 회사 분위기도 좋지 않았기에 더더욱 퇴근 시간을 기다렸건만. 하지만 일개 직원의 대답은 한정되어있었다. “네, 좋아요. 하하”


“은희 씨는 소주 먹을 거지?”

“아, 저는 다음날 일찍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그냥 맥주 마실게요.”


맥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은 탄산도, 취기가 올라오기 전부터 배만 부른 상황도. 난 엄연히 ‘소주파’였다. 하지만 그날은 취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대하던 다음 날의 여행에 지장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술을 거절할 분위기는 아니기에 비교적 가벼운 맥주를 선택했다. 한잔 정도 마시고 집에나 가자는 생각이었다. 맥주잔에 가득 맥주를 따랐다. 건배- 벌컥벌컥 잔에 따른 맥주 대부분을 마시고 나서 속으로든 생각은 하나였다.


‘캬... 미쳤다...’


그래 미쳤다. 뭐지 이 시원함은? 뭐지 이 상쾌함은?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솨-아 하고 맥주와 함께 위장으로 흘러가 소화가 되는 듯한, 그런 기분. 미쳤다. 정말 미쳤다. 너 왜 이렇게 맛있어? 이후 부드러운 한우 한 점 입안으로 들어가니, 아 회식 자리만 아니라면 정말 완벽한 저녁 식사였다.



2.

탁- 뭐 먹을 게 없나 싶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작은 냉장고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맥주가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서울에 있는 학원에 다닌다고 올라온 언니와 같이 살게 된 지 며칠째, 자취방에 ‘언제나’ 술이 있는 장면은 영 어색하다. 술을 자주 먹는 편이다. 술을 좋아한다기보다 회식 자리가 자주 있는 편이었고, 회식이 없어도 회사 동료들과 거의 매일 저녁과 함께 술을 먹는 편이었다. 술은 나에게 일의 연장선이었다. 동료들과의 친분을 쌓는 일, 그날 하루의 스트레스를 조금 분출하는 일, 다음날도 다를 것 없는 똑같은 날을 인정하는 일. 매일 술에 취해 돌아와 바로 자버리고 출근하는 일상만 반복하다 보니 홀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만큼은 술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혼술을 하기에 소주는 너무 쓰기도 하고.


아빠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언니는 누구나 인정하는 술꾼이었다. 술을 한번 먹으면 화끈하게 먹는 사람이었고 평소에도 자주 술과 함께했다. 같이 저녁을 먹는 날이면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한 캔 꺼내 들어마시곤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맛있어 보여 가끔 나도 맥주를 꺼내 같이 마시곤 했다.

언니가 학원과 가까운 친구 집에서 같이 살게 된 이후부터 냉장고 안에 언제나 맥주가 있지는 않았지만, 가끔 아니 자주 맥주가 냉장고 한편에 자리해있었다.



3.

“나 맥주는 안 마셔. 그런데 미얀마 맥주는 진짜 맛있다.”


결혼한 지 별로 되지 않아서 남편과 남자 친구를 섞어 사용해 혼돈을 주기도 하고, 채식주의자라 선언했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으며, 지나가다 갑자기 낯간지러운 말을 툭 내뱉기도 하고, 음악을 사랑하던, 태국 치앙마이에서 만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언니가 있었다. 저녁이 되면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한가득 사 와 게스트하우스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언니는 항상 맥주가 아닌 와인을 마셨다. 맥주를 좋아하지 않아 마시지 않는다는 언니는 모순되게 그 뒷말에 미얀마 맥주는 정말 맛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언니 덕분에 우리는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여행지가 미얀마로 결정된 나에게 언니의 말은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며칠째 이동은 피곤함에 피곤을 더하는 짓이었다. 태국에서 미얀마로 육로 이동, 이후 미얀마의 수도인 양곤에 도착했지만 나의 목적지는 어디까지나 파고다 사이로 떠오르는 열기구의 풍경을 볼 수 있는 바간이었기에 그날 당일 야간 버스를 타고 바로 바간으로 이동했다. 아침 7시도 되지 않은 시간, 숙소에 체크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슈퍼에 들어가 맥주를 사 들고 나왔다. 그 숙소에는 여행에서 만난 동생이 동행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맥주를 사 들고 들어와 마주친 동생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심각한 미세먼지와 비수기로 인해 불과 며칠 전 열기구가 중단되었다니... 아, 수많은 파고다 사이로 일출과 함께 떠오르는 열기구들. 사진 한 장에 반해 미얀마를 찾아온 나는 도대체 뭐가 되는가. “근데 아침부터 술이야?”라며 묻는 동생에게 애써 웃으며 맥주캔을 따고 맥주를 마셨다. 사실 맥주 맛을 몰라 어떤 게 맛있는지는 잘 구별을 할 수 없었지만, 슬픈 소식에도 목 넘김이 좋구먼 이 맥주.


미얀마 여행은 전체적으로 보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완벽한 비수기에 여행하던 여행지도 처음일뿐더러 심각한 미세먼지와 그보다 더 심각한 더위가 여행에 이리 큰 지장을 주는지도 처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필 카메라가 고장이 나던가, 예약했던 비행기가 운항 중단으로 수수료를 크게 물어야 했던가 등 안 좋은 일도 한꺼번에 겹쳐서 좋은 추억으로 남지는 못한 여행이었지만, 여행이 끝나고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미얀마는 다시 한번 가고 싶은 여행지 순위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전적으로 ‘미얀마 맥주’ 덕이다. 약 한 달간의 미얀마 경비의 반은 맥줏값에 들 정도로 아침에도 맥주 한잔, 점심에도 맥주 한잔, 저녁에도 맥주 한잔, 자기 전에도 맥주 한잔. 어느덧 나는 1일 4 맥주를 실천하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맥주 맛을 모른다. 하지만 미얀마 맥주가 계속 찾게 되는 마성의 맥주임은 틀림없다 단언할 수 있다.



4.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터키 이스탄불의 저녁. 그날도 동행들과 맥주 한잔으로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잠시 산책하고 올 테니 먼저 자라는 그 친구를 뒤로 한 채 자리에 누웠는데, 한참을 생각하다 벌떡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고 밖을 나섰다. 나를 발견하곤 놀라는 그 친구에게 나는 “그냥, 맥주 한잔할까?”라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조금 더 대화하고 싶어서 그 친구를 찾아 나섰다. 며칠째 느껴지는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더 느끼기 위해, 그 친구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아가고 싶어서. 어느 길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한참 대화를 나눴다. 맥주 한 모금에 설렘 한 모금, 대화 한마디에 웃음 한번. 이후 한잔 더 하겠느냐는 나의 말에 맥주 한 병씩 더 사 들고 숙소 뒷문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또다시 한 모금, 두 모금.


갑자기 그 친구가 벌떡 일어났다. “나 그만 들어가야겠어.” 그렇게 뒤돌아 숙소에 들어가는데, 에이 설마 장난이겠지. 1분... 2분... 3분... 몇 분이 지나도 그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숙소 뒷문을 바라보다, 아직 가득 차 있는 맥주병 안의 맥주를 바라보다, 저 멀지 않은 건너편 가게에 앉아있는 아저씨를 바라보다, 또다시 맥주를 바라봤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아름다워 보이던 이스탄불은 갑자기 낯설디 낯선 도시로 변해버렸다. 맥주가 아까워 벌컥벌컥 맥주를 마시다 도저히 두 병은 못 마실 것 같아 길가에 맥주를 부었다. 콸콸- 이 근질거리는 분위기는 나의 착각이었나, 아니 분명 썸이지 않았나, 며칠째 나누던 대화는 깊지 않았는가, 분명 신호는 걔가 먼저였는데, 아니 착각이었나, 진짜 착각이었나, 아니 착각이었더라도 이 늦은 밤에 여자 혼자 두고 혼자 숙소에 들어가는 게 어디 있어?! 아... 쪽팔려... 콸콸 쏟아지는 맥주와 함께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창피함 또한 콸콸 쏟아져 나왔다.



5.

맥주가 없다. 주섬주섬 겉옷을 입고 집 앞 편의점으로 나갔다. ‘수입 맥주 4캔에 만 원’ 입에 착 달라붙는 이 아이디어는 도대체 누가 낸 것인지! 익숙하게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4캔을 골라 집으로 들어왔다. 맥주 안주로 산 대용량 육포를 그릇에 가득 담고 차가운 맥주와 함께 방에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탁- 아, 시원해.


요즘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 되었다. 선선한 밤,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나의 감정을 꾸역꾸역 하얀 화면 위에 담아내는 시간.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마음이 빼앗겨 금방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딴짓하기 바쁘지만 말이다. 사실 맥주를 좋아하는 건지 맥주를 마시면 살짝 올라오는 그 취기가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어떤가 싶다. 어찌 됐든 맥주는 나의 감정을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울적할 때는 저 깊은 우울한 면까지 끌어올리고 기분이 좋을 때는 한껏 텐션을 올려주며 그렇게 늦은 밤, 나에게 나의 감정을 똑바로 마주 보는 시간을 선사해준다.


단점이 있다면 이런 늦은 밤과 노래 그리고 맥주는 자칫 심각한 감성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이지만. 내일 아침 이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면 오글거림에 이불 킥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오늘도 나는 맥주를 마신다. 오늘 밤도 나는 나를 마주한다.





해당 글은 일간 문학지 '어느 저자'에서 '은희'로 활동하며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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