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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은희 Sep 19. 2021

무엇에도 가치가 없던 것은 없었다

불타는 고구마,

아르헨티나 엘 찬텐에 위치한 피츠로이의 봉우리가 해가 떠오르는 짧은 순간에 빛을 받아 마치 붉게 타오르는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마 대한민국 여행자에겐 세계 5대 미봉이라는 별명과 함께 (어쩌면 그것보다 더) 유명한 별명 인지도 모르겠다. 동행 P와 나 역시 남미의 파타고니아 일정 중 피츠로이 등반을 계획했다. 피츠로이를 나타내는 내용 중 3대가 덕을 쌓아야 맑은 하늘의 피츠로이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SNS의 피츠로이 사진은 거의 다 맑은 하늘의 피츠로이였고, 인간은 누구나 ‘특별함’을 추구하기에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해 붙여진 형용사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엘 찬텐 전까지의 남미 여행이 비가 온다는 날씨 예보와 반대로 맑은 하늘을 보여줬기에 생긴 자신감일 수도 있겠다.

그 자신감이 무너진 건 엘 찬텐에 도착하고 하루가 지나고 나서였다. 야간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도착한 엘 찬텐은 하늘이 하늘색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뿌연 하늘을 보여줬다. 빗방울까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은 분명 맑은 하늘을 보여줄 테니. 비록 그 희망은 밤새 내린 비로 인해 와장창 무너져버렸지만 말이다. 그저 ‘비가 내렸다’ 면 희망을 붙들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이대로 가다간 숙소 창문이 부서지지 않을까라는 의혹이 들 정도로 밤새도록 세찬 (마치) 폭풍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일주일 후 예약된 비행기로 인해 촉박한 시간이었기에, 며칠 더 숙소를 연장해 맑은 하늘을 기다리다 피츠로이를 등반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에 계획한 또 다른 파타고니아의 핵심인 W 트레킹을 하러 이동할 것인가. 어쩌면 무엇을 선택하든 둘 다 놓칠 수 있는 일이었다. 며칠을 기다려도 엘 찬텐은 맑은 하늘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고, W 트레킹을 하러 이동한다 해도 그곳이 날씨가 좋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결정에서 우리는 전자를 선택했다. 겉으로는 피츠로이를 선택하는 것이 더 높은 가능성이 있다 말했지만, 사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3박 4일이 걸리는 W 트레킹이라는 이름의 고생을 자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고통이 동반된다면 적어도 3박 4일이라는 기나긴 고통보다는 반나절이라는 짧은 고통을 택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말은 안 했지만 동행 P 역시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엘 찬텐에 머무른 지 4일째, 드디어 다음날엔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그 예보를 증명하는 것처럼 하늘은 조금씩 하늘색을 띄우고 있었고, 우리는 다음날 이른 새벽 숙소를 나서 피츠로이로 향했다. 피츠로이 등반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의 트레킹 덕분에 체력이 조금 늘었을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고산지대가 아니기에 숨이 크게 차지 않았다. 하지만 피츠로이를 다녀온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마지막 마의 10km 구간은 초반부터 아찔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리고 그저 주저앉고 싶은 마음만 가득할 때, 하필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칫 발이 삐끗하다 넘어지면 죽을 수 있을 만큼 가파른 구간에서 우리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5일이나 기다렸는데, 새벽 2시에 나왔는데, 목적지가 코앞인데. 오기 하나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겨우 높은 언덕 꼭대기에 도착해 숨어있던 피츠로이의 봉우리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아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이미 불타는 고구마는 지나쳤고 조금씩 몰려오는 구름에 피츠로이의 봉우리는 가려져 있었다.

오기는 결과가 실패로 돌아가자 후회로 바뀌어 몰려왔다. 조금만 더 일찍 출발할걸, 처음부터 서둘러 산행할걸, 조금 더 엘 찬텐에 늦게 도착했더라면 날씨가 좋지 않았을까. 선택하지 않은 과거의 선택과 현재를 비교하며 내 선택을 비난하다, 순간 뭐 어떤가 싶었다. 어쩌면 나는 마의 구간을 올라오는 순간부터 불타는 고구마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올라온 이유는 불타는 고구마를 봐야 한다는 의지보다는 ‘올라간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날씨가 좋지 않았기에 엘 찬텐의 4일은 어떤 때보다 여유로운 휴식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산행하다 잠시 돌에 걸쳐 앉아 바라본 밤하늘은 여행하며 바라본 밤하늘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기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뿌듯함으로 이어졌고, 반대편에서 보여주는 주황빛 일출을 배경 삼아 먹는 간단한 아침은 차가웠지만 희한하게 따뜻하기도 했다. 비록 불타는 고구마와 완벽한 피츠로이를 본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 산행이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인생이 수없는 봉우리로 이어져 있는 산이라면 우리는 매 순간 봉우리에 존재할 온갖 휘황찬란한 보상을 기대하며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는 중일 것이다. 힘겹게 도착한 목적지에는 보상이 없었고, 다음 봉우리에는 있을 거라는 기대에 또다시 올라가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후회 속에서 지난 산행을 되돌아볼 때 결과가 어떻든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고 느끼는 것,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생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산행을 마치고 P와 나는 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버스 안에서 뒤돌아 바라본 피츠로이는 배신감이  정도로 구름   없이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차피 불타는 고구마를 보지 못할  조금만  늦게 산행할걸 하는 후회가  끝까지 차올라왔지만, 억지로 억눌러 가라앉혔다. 무엇이든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아름다운 피츠로이를 바라보며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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