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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타임조아나 Sep 25. 2020

세상의 모든 외로움에게

산티아고 순례길 : 프롤로그




산티아고 순례 10일 차




  다행히도 몸에는 이상이 없다. 

생장에서 떠나고 난 후, 이틀은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더니만 

이제는 멀쩡해져서 뛰어다니기도 한다. 발에 물집도 없고 발목도 괜찮다. 

다만 화장실을 제대로 가지 못해서 속이 더부룩한 것만 빼면. 




  걸으면서 스페인어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면 꾸준히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해야지, 생각했다. 어떻게 공부하지.....  아! 단어를 많이 봐야지. 아침마다 영어와 스페인어로 된 짧은 기사를 읽는 거야. 그걸 하루 이틀 하다 보면 내년 여름 대학 졸업할 시기가 오면 영어와 스페인어로 간단한 시사토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멋있고 능력 있게 나이 들다 보면 잘생기고 겁나 젠틀하고 섹시하고 좋은 아빠가 될 자질이 충분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어도 자유로운 날들이 오지 않을까...... 먼듯하지만 그렇게 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다 돌에 걸려 억, 하고 넘어질 뻔하면서 '그래, 지금 걷는 일에나 충실하자' 하고 가방끈을 다시 조인다.




1.
  누군가 나에게 이 길을 왜 걷느냐고 물으면 나는 늘 졸업 전 마지막 발악이라고 대답했다. 졸업 전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졸업작품으로 써야 하는 소설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바보 같던 지난 연애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라고 대답했다. 사실 다 맞는 말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깨닫는 사실은 이 시간은 나에게 너무나도 필요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길 위에서 혼자가 되는 것은 두렵고 버겁고 외롭지만 그래도 촉촉이 젖은 산길을 밟으며 그래, 여기 오길 잘했어...  정말 잘했다 하고 다독인다.



2.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행복해지고 싶었다. 물론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고 더욱 풍성해진다지만, 그것에 얽매이게 되면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기도 전에 그 시간들을 다른 이들로 채우게 된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나는 매력적인 여자고, 나는 지금도 잘하고 있어!' 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잘살고 있어. 무섭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잘해나가고 있으니 걱정 마, 하고 응원해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졸업까지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을 선언했고 아빠와 엄마는 남모를 걱정이 많으셨을 것이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며칠 전 아빠와 차를 타고 오다가 다투었다. 이때 아빠는 나를 보고 '총체적 난국'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고민해보라고, 다른 애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을 좀 해보라고 하셨다. 세상에, 총체적 난국이라니! 다른 애들이 뭘 하고 있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나도 화가 단단히 나서 아빠와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그 인생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며 소리를 질렀다.



3.
  아빠는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신 것뿐이다. 그걸 알기에 부모라는 존재는 인생 최고의 지지자이자 방해꾼인 것이다.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그건 낭비가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하기 위해 일 년동안 버텨 온 일들은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꼭 해봐야 할 일들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고 돈을 모으는 과정은 일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부담감을 줄여주었고, 까미노를 기획하고 스페인 비자를 준비하는 과정은 앞으로 내 인생에서 남은 80년 가까운 시간에 대한 깊은 사색과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이 길의 끝에서 모든 것이 마법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결책이 '짜잔!' 하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길 위의 '시작의 나'와 '끝의 나'는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발자국 하나하나에 그것이 진득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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