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 가장 처음의 여행
어원) 역마살(驛馬煞) : 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팔자.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고도의 통신기술이나 교통시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마다 역참(驛站)을 두고 그곳에서 말을 갈아타며 급한 볼 일을 보러 다니곤 했다. 이때 역참에 갖추어 둔 말을 '역마(驛馬)'라고 하는데 이 역마는 당연히 많은 곳을 다니게 마련이다. 그리고 '살(煞)'은 사람이나 물건 등을 해치는 독한 기운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살 맞았다'와 같이 쓰인다. 따라서 '역마살'이라고 하며 천성적으로 역마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팔자라는 뜻을 갖게 되었으며 "저 친구 역마살이 끼었군"하는 식으로 말한다. 같은 뜻을 가진 역마 직성(驛馬直星)이라는 말도 있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난 역마살이 좀 있는 것 같아
있어, 도 아니고 있는 것 같아는 뭐야?
그냥, 이 세상은 나의 넘치는 역마살과 끼를 다 포용해줄 수 없다는 그런 느낌이 든달까.
중학생이었던 난 역마살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돌아다니는 것'을 '많이' 좋아하면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이제야 찾아본 역마살의 뜻은 그것보다는 더 끈질긴 '운명'의 느낌이 더 강하다. 거부할 수 없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늘 곁에 있는. '살煞'이 '혼' 혹은 '귀신'의 의미가 강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만, 어찌 되었든 끊임없이 움직이는 삶을 타고난 인생을 부르는 말로는 딱이다.
문방구 스티커가 사고 싶었을 뿐
나의 역마살은 오래전, 아주 어렸을 때 시작되었을거다. 5살 무렵, 나는 혼자 스티커를 사러 동네 문방구에 들렀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엄마가 자고 있는 사이,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다가, 500원 스티커를, 여러 장도 아니고 딱 한 장을 사 왔던 것이다. 마치 동화 속의 말괄량이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기 전 두근거리는 심정을 표현하는 노래를 부르듯, 부푼 마음을 안고 노오란색 버클이 달려있던 엄마 지갑에서 만원 한 장을 꺼냈다. 횡단보도를 몇 개를 건넜을까.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문방구에서 '겨우' 500원짜리 스티커를 하나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엄마가 거실에 앉아있었다.
뇌리에 강하게 박힌 다음 장면은 울고 있는 나를 안아주던 엄마의 커다란 손. 그 날 나는 엄마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2015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던 날, 인천공항에 데려다주시며 엄마는 '도둑질을 했다는 것도 속상했지만 잘 걷는 것도 불안한 나이에 혼자 그 멀리 나갔다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화가 났다'라고 했다. 그때부터 였을까. 나의 역마살이 시작되었던 것이.
무엇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다섯 살의 나. 아끼는 티셔츠는 백설공주 티샤쓰. 루루공주 왕관을 쓰고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다 보는 인어공주 더빙판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다섯 살의 나. 가끔 스물여덟의 나는 엄마 지갑에서 만원을 훔치던 다섯 살 곁으로 다가가 함께 횡단보도도 건너 주고, 문방구 문도 열어준다. 그리고 엄마에게 혼이 나 엉엉 울고 있는 나를 얼르며 귓속말로 조곤조곤 속삭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돈은 여쭤보고 꺼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