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갬성'
고요한 교실에서 혼자 시를 쓴다. 연필이 종이에 제 몸을 비비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김장을 하는 날은 칼과 도마가 부딪히는 소리다. 스님의 목탁소리처럼 맑은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 아빠의 청춘을 쏟아 마련한 자금으로 주택이 지어지기 전까지 나와 가족들은 김장을 하러 할머니 댁으로 가야 했다. 엄마는 새파랗게 날 선 칼로 부추와 파를 썰었고 칼등으로 마늘도 찧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나무로 만든 칼 손잡이는 반질거렸다. 꼭지가 단단하고 퍼런 자국이 남아있는 무와 배추를 커다란 고무대야에 담아 씻어놓으면 엄마가 그것들을 담기 좋게 잘라내어 다른 고무대야에 담았고 할머니가 소금을 뿌렸다. 하얀 소금이 탁탁 배추위에 뿌려지면 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나와 구경했다. 할머니는 엄마 옆에서 풀을 쑤었다. 밤새 절여 숨이 죽은 배추와 무들을 꺼내와 다시 헹구었다. 새우젓의 비릿하지만 고소한 냄새, 파와 마늘의 알싸함이 온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풀과 고춧가루를 섞고 썰어놓은 야채들을 넣고 버무리다가 할머니가 한껏 흥정해 싸게 들여온 젓갈도 한 대접 털어 넣는다. 그리고 다시 휘휘 섞어놓으면 엄마가 한입 맛을 본다.
어머님, 뭐가 빠졌어요, 하면 그제야
액젓! 하시며 고춧가루 묻은 손으로 액젓을 집어 드신다.
그때, 액젓이 쏟아지던 순간 감돌던 냄새는 바다냄새도, 멸치 냄새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 내가 기억하는 김치냄새의 전부였다.
엄마가 소리 내어 울던 날을 기억한다. 화난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엄마는 토해내듯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집안어른한테 큰 소리야! 집안이 망하려는 게야, 망하려고 이러는 게야. 낮말을 훔쳐들은 새가 엄마에게 와서 속닥거렸는지 아니면 거실 맞은편에 있던 방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탓이었는지 집안 으른들의 '며느리 뒷담 까기'를 부엌에 앉아 마늘 까던 엄마가 기어코 듣게 된 것이다. 비밀이 탄로 나는 역사적인 순간에 엄마는 까던 마늘을 부엌 바닥에 내팽개쳐버리고는 손에 작은 부엌칼을 쥐고 울었다. 아빠는 엄마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가방을 꾸려 고모네 집으로 가셨다. 끓어오르던 된장찌개도 울음소리와 오가는 큰 소리 때문인지 제 몸을 덥혀 가스불을 꺼버렸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나가 해장국을 사주었다. 선지를 숟가락으로 뚝뚝 잘라 한입에 넣었는데 코 끝이 알싸하게 매워졌다. 아빠는 나를 힐끗 보더니 왜 우냐고 물었다. 왜 우냐고.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 기업의 연구원이 되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 도심가에 자리한 유명 레스토랑에 취직했지만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엄마는 자기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간 거라고 고등어 가시를 바르며 말했다. 아빠는 말없이 컵에 물을 따랐다. 엄마는 신사동 근처 어느 빌딩에 위치한 컴퓨터회사에 다니던 아가씨였는데, 아침에 출근 해 자리에 도착하면 서랍이며 책상 위에 초콜릿과 사탕이 놓여 있었다며 아빠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빠는 묵묵히 아욱국을 들이켤 뿐이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저거 다 거짓부렁이야, 했다.
엄마는 어렸을 적 시골에서 부모님의 밭일과 논일을 도와드리며 자란 아이 치고는 꽤 하얗고 고운 피부를 자랑했다. 잡초를 뽑고 애호박 넝쿨에 물을 주고 돌아오는 길에 된장찌개에 넣을 호박잎을 따 가지고 돌아갔다. 하지만 엄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큰언니가 서울로 시집 가게 되었고 엄마는 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큰언니네 서울집 김치에서는 수돗물 맛이 났다. 씹으면 씹을수록 배추의 고소한 단물이나 시큼한 액젓의 쿰쿰함 대신 입에서 설겅거리는 새 집 냄새가 났다. 왜 그 냄새 있잖아, 새로 지은 건물에 들어가면 구석구석 남아있는 냄새들, 그런 냄새가 났어. 엄마는 아빠를 만나 퇴사하는 날까지 '서울 집 김치'를 먹지 못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보름 만에 돌아오셨다. 엄마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면 할머니가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고 부엌에서 커피를 마시던 엄마는 방으로 들어갔다. 쿵, 하고 문소리가 울린다. 쿵, 쿵, 쿵 하고 문이 닫힐 때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쓰던 글을 지우개로 박박 지웠다.
작은 하숙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젊은 날의 아빠는 가만히 엄마의 손을 잡는다. 깊은 한숨에 묻어 나오는 긴장감에 엄마가 피식, 웃는다. 은주 씨, 엄마를 은주 씨라고 부르던 젊은 날의 아빠. 맞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오지만 아빠는 엄마의 손을 놓지 않는다. 무한한 시간이 젊은 날의 아빠와 엄마의 입술 사이 어딘가에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가까워질수록 하숙집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둥그렇게 둘을 감싸앉는다. 그때, 닫혀있던 미닫이문이 덜컥 열리며 한 아저씨가 헛기침을 한다. 아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고요의 풍요 속에서 아빠는 땀에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지른다. 엄마는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웃는다. 아저씨가 아이고, 하며 신물을 신고 걸음을 옮기는 소리와 애석하게도 멈출 줄 몰랐던 엄마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젊은 나는 아버지가 흘리는 땀방울을 훔쳐보고는 킥킥댄다. 이마를 닦는 손바닥이 안쓰럽다. 벌컥 열리는 미닫이문을 다시 닫아줄 수 있다면 날 세상에 내려놓은 일에 대한 작은 보답을 할 수 있을까. 액젓 냄새가 가득한 알싸한 시골집 김치를 엄마 입에 돌돌 말아 넣어 준다면 그것으로 젊은 날의 엄마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글쓰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가만히 내 이름을 읊조려보았다. 검은 밤하늘에 공기가 맑게 퍼져나간다. 멀리 사라진 입김은 나무에, 가로등에, 옆집 벽돌에 달라붙어 스며들겠지. 스며든 숨결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증발해 우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그쯤이면 젊은 나는 엄마와 아버지를 안아 들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방울을 닦아주고 입가에 말라붙은 우유를 닦아주고 있겠지. 아- 아- 아- 밝게 비추던 가로등이 흔들리다 사그라졌고 그 빈자리를 곧 달빛이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