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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타임조아나 Aug 06. 2023

착한 딸, 그만둡니다.

K-장녀의 완벽한 독립을 위해

삼겹살을 남겨놓지 않은 것이 그렇게 서운 할 일인가?


그렇다. 서운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생고기를 남기든, 구워놓은 한 조각을 남기든, 아차 싶어 '어머, 얘 미안하다. 저녁을 먹고 오는 줄 알았네'와 같은 변명이라도 남겼다면 이렇게까지 서운했을까. 공감하는 전국의 모든 딸들은 알 것이다. 이게 단순한 삼겹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삼겹살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더럽고 치사해서 직접 사서 구워 먹는다! 식의 위로를 가지고는 해결될 수 없는, 가슴 아래 묵직하게 밀려오는 억울함과 왠지 모를 씁쓸함을 달래고 얼러서 겨우 잠재운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아유, 뭐 이런 걸 가지고 서운해하냐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당히 이야기하고 싶다. 그냥 가던 길 가세요. 이제부터 내가 서운하다면 서운한 거라고! 


EP1.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비 오는 날 극단 선배들이 엄마 앞에서 단체로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한 일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먼지 날리는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것이 낙이었던 나에게 공연준비를 위해 외박허락을 받는 일은 고도의 눈치게임이었다. 엄마가 기분이 좋을 때를 노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씨알도 먹힐 리가 없지. 막차 타고 와, 짧고 굵은 답변이다. 어차피 주말에 연습하러 나갈 거 잠은 집에서 자고 나가라는 엄마와 다른 친구들 선배들 다 남아 연습을 하는데 어떻게 나만 쏙 빠져나오냐는 나의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 대화. 결국 늦게까지 연습을 하느라 막차는 놓치고 울리는 전화도 받지 못했다. 부재중 전화 13통. 동생에게 온 문자 하나. '언니, 엄마 지금 학교로 가고 있어. 화가 많이 났어.' 아, 이제 내 대학생활은 끝이 났구나. 눈앞이 아찔했다. 다음날 공연 연습을 하기 위해 소극장으로 돌아가 선배들에게 대신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극단장 언니는 아무 말하지 않고 커피 한 잔을 더 사줬다.


EP2.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던 때, 스승의 날이 되면 부모님들께서는 아이들 손에 과자며, 편지며 선물을 들려 보내셨다. 한 아이의 부모님께서는 직접 담그신 레몬 생강청을 보내주셨다. 집에 가지고 와 자랑을 한바탕 하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때 받은 청이 생각나 탄산수에 한 잔 타마실까 하고 찾는데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사촌언니가 가지고 싶어 하길래 줘버렸단다. 아니, 왜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줘? 대꾸하자 예민하게 뭘 이런 걸 가지고 허락까지 받아야 하냐고 화를 내고 되려 짜증을 낸다. 내 선물이라고! 상해서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내가 버린다고!! 내 걸 왜 엄마 마음대로 다른 사람한테 줘!! 울분을 토하자 또 나만 소리 지르는 못된 자식이 된 아이러니한 상황. 보다 못한 동생이 엄마, 이럴 땐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하자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EP3.

  현남친은 '화'라는 걸 모르고 자란 사람 같다. 아니, 이 사람 안에 '화'가 없다. 현남친과 연애를 하며 불처럼 타오르던 속상함과 억울함이 조금씩 풀리는 경험을 한다. 미안한 일을 미안하다고 할 줄 아는 사람과의 연애는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지 않는다. 나는 지랄 맞은 면이 있기 때문에 화가 나면 잘못한 것을 알아도 쉽게 미안하다고 하지 못한다. 이 사실을 알고 엄청 울었다. 엄마의 제일 싫어하는 모습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니! 이러한 비극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현남친은 이런 나를 침묵하게 하기보다 인간의 언어로 조리 있게 설명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옆에서 기다려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걔는 괜찮대? 감정받이가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야,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이 세상에 처음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 다 처음이지. 엄마는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지만 나는 첫째 딸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적이 없다.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고? 부모가 배부르게 먹이고 따뜻하게 입혀서 이만큼 길러놨더니 은혜도 모르게 속 터지는 소리를 한다고? 나는 그들의 초대로 이 세상에 왔다. 초대에 응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 거다. 그리고 그것으로 해야 할 일을 해내고 있다. 하지만 엄마와의 애착형성이 제대로 되었다면 지금 보다 더 잘나고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뱃속에서 나온 순간부터 독립된 개체라는 것을 알기에 독립을 외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되새긴다. 오은영 박사님이 연예인 모녀를 상담하며 정상퇴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성인 자녀가 가끔 어리광을 부릴 때가 있는데, 이 과정을 통해 긴장감을 완화하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에 치유의 의미가 있다. 나의 감정을 말한다고 해서 이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하거나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보다는 과정 자체가 가지는 치유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겹살로 다시 돌아가면,

내 것도 남겨주지. 한마디를 했더니 돌아오는 건 백마디다.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어떻게 알고 저녁을 남겨놓느냐,부터 시작해 

미리 문자를 줬으면 내가 안남겨놨겠냐, 로 

결국 대화의 끝은 내 잘못이라는 것. 



https://youtu.be/QTA2vHNqlSc

https://youtu.be/YPI0eg0t-6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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