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의 일종
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거기서 느끼는 내 생각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도 전형적인 문과 학생의 행동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새로운 읽고 싶은 책이 나왔다거나, 평이 좋은 영화가 나왔다거나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
회사 생활을 하기 전의 내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 직업은 좋은 물건을 해외에 팔아야 되는 해외 영업맨이었다.
지금 내 성격을 비춰보면 국내 영업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형의 추상적인 것들을 좋아했던 내가 유형의 물질적인 것을 해외 바이어에게
소개하고 조건을 합의하여 목표한 물량을 팔기 위해, 담당 제품을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이
나의 주된 업무였다.
내가 담당한 제품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오랫동안 내 담당 제품은 IT제품, 즉 PC와 그 관련 제품들이었다.
학교에서 PC도 사실 리포트나 논문 쓰는 정도 이외에는 써본 적이 없었다.
데스크톱 PC가 집에 처음 왔을 때 몇 가지 게임을 해본 게 전부였고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랬던 나는 제품의 사양을 사회나 역사 공부하듯이 열심히 암기를 하였고
보통의 사용법만이 아닌 실제로 사용, 설치도 해보고 마치 전문가가 점검하는 듯한 방법들을 숙지해야 했다.
우리 브랜드 제품만이 아니라, 경쟁사와의 차별점을 보여주기 위해 경쟁사 제품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했다.
집에서도 사용하지만, 회사에서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는 기본 장비가 돼버린 IT 제품들을
해외 주재하는 나라에 소개하고 판매하고, 더 많이 팔리게 하기 위해 각종 마케팅 활동을 하면서 보냈다.
신제품은 매년 출시되니 매년 동일한 Process의 반복을 하면서 지냈다.
이 업종에서 근무하다 회사를 옮겼으나 거기도 전자 제품 관련 회사였다.
대기업을 떠나고 내가 처음 한 것은 아이폰을 사는 것이었다.
내 담당 제품은 아니지만 회사에서 스마트폰을 팔고 있고, 직급도 있는데
도저히 아이폰을 사서 버젓이 들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회사를 떠나고 이후 처음 산 아이폰이 몇 차례 바뀌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최근 애플의 아이폰 17시리즈와 Watch 등이 출시되는 것을 보면서 전작 시리즈와 어떤 차이가 있고
경쟁사의 최신 제품과는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그리고 가격은 어떻게 책정이 되는지
나도 모르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동일한 업무를 20년 이상 한 나의 아직 벗어나지 못한 직업병인가 보다.
나는 솔직히 디자인도 보지만, 성능에 더 관심이 많다.
슬슬 스마트폰 교체에 대한 물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