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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지니 Aug 01. 2023

000. 기억에 남는 그림책 있으세요?

100권의 그림책 이야기를 위한 프롤로그

<성인을 위한 영어그림책> 강연을 하면서 제일 첫 시간에 하는 질문이 있다.

"여러분의 어린 시절에 본, 첫 번째 그림책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대부분 똑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눈망울을 굴리며 뭔가 기억해 내려는 표정들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그 순간들이 느껴지면서, 고개는 옆으로 살레살레, 갸우뚱...


1970년대 중반에 태어나 19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나 역시, 책을 그리 쉽게 접해보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용산구의 한 길가에서 기사식당을 차린 공간의 한편에 방 하나를 만들어 살던 우리 가족의 살림살이에 책은 그리 중요한 물품이 아니었다. 방바닥에 무심히 놓인 그림책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우연한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렇게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생애 처음으로 주어진 첫 그림책은 <꼬마 삼보 이야기>다.


성인이 된 후에는 그림책을 볼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이 그림책을 떠올린 적도 없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와 그림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 이 책에서 봤던 그림이나 이미지는 떠올라도 그 이야기를 세세하게 기억해내지는 못했었다. 즉, 나는 책의 텍스트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이 책에서 본 어떤 장면만큼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야자수 나무 아래를 빙글빙글 도는 호랑이가 아프리카의 너무 더운 날씨에 녹아서 버터가 되어버린 장면. 이 그림책의 이미지는 바로 이 버터가 되어버린 호랑이 이미지로 나의 머릿속에 떠올랐고, 동시에 내 코 끝에는 호랑이 버터의 풍미가 느껴질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 그림책을 읽고 내 머리에 남은 것은 텍스트가 아닌 강렬한 이미지와 심상이었던 것이다. 바람 없는 후텁지근한 아프리카의 날씨의 심상. 더불어 떠오른 건 무서운 호랑이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웃지 못할 사건, 더위에 자기 몸이 녹아도 계속 돌아야만 했던 이유가 뭘까 하는 궁금함. 결국 나는 그림에서 다시 텍스트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다시 밟고 있다.

<꼬마 삼보 이야기>중 호랑이가 서로 쫒으며 달리는 장면

그림책 속의 그림은 이런 효과가 있다.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지만, 기억과 함께 같이 떠오르는 감각적인 심상으로 인해서 엉뚱한 삶의 재미를 느껴볼 수 있다고 할까. 내가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그림책, 그리고 책으로 하는 육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내 장기기억저장소에서 영원히 끄집어내지 못했을 이 이야기책을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겨두고 있다.


그림책은 그야말로 그림이 주가 되는 책이다. 그림이 그림책의 주인공이다. 텍스트가 전혀 없어도 그림만으로 그림책은 존재하고, 텍스트는 그림을 통해 더 깊은 울림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이를 그림책 작가 앤소니 브라운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Picturebooks are for everybody at any age,

not books to be left behind as we grow older.

The best ones leave a tantalising gap between the pictures and the words, a gap that is filled by the reader's imagination,

adding so much to the excitement of reading a book.


- Anthony Browne-


앤소니 브라운이 위에서 말하듯, 그림책은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를 위한 책이며,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냥 잊고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그림책은 그림과 텍스트 사이에 아주 미묘한 간극을 남겨두고, 이 간극은 독서의 흥미로움에 더해지는 독자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림책을 읽을 때 천천히,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한다. 텍스트만 볼 때는 빨리 읽지만, 그림을 볼 때 우린 자세히 본다. 시간과 정성을 좀 더 들이게 된다. 때문에 읽는 것이 느린 독자도, 충분히 이유 있게 느리게 읽을 수 있다.


그림책에 대한 나의 생각과 함께 앞으로 천천히 백 걸음을 가면, 나는 어디에 도달해 있을까 궁금하다.


오늘, 내 기억 속에 의미를 가진 하나의 그림책이 들어왔다.


반갑다, 그림책!

천천히 같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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