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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Aug 30. 2021

한 거인을 추모함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대구에서도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티케팅은 쉽지 않았다. 남편은 관람 시간 직전에 반납된 입장권을 노렸다. 대구미술관 홈피를 들락거리기를 30 여분만인가. 당장 한 시간 후에 입장하는 티켓 두 장을 득템했다며 으스댄다. 10년에 한 번 쯤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인물 인증!


특별전의 제목은 ‘웰컴 홈: 향연(饗宴)’으로 삼성과 대구의 인연을 은근 강조한다. 근·현대 작가 8명의 작품 21점이 전시됐다. 총 23,000 여점의 미술품과 문화재 기증품 중 1/1,000 정도의 약소한 분량. 하지만 예외 없이 날마다 매진이었으니. 이건희컬렉션이 불러일으킨 돌풍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이인성, 이쾌대, 서동진 등 대구 출신의 근대 화가와 변종하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들이라서 더 친근하다.


특별전 초입엔 대구에서 성장한 삼성의 요약된 역사가 등장했다. 창업주 이병철과 이건희 부자의 이야기도 곁들여있었다.


알면 알수록 참으로 어마어마한 이씨 가문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 삼성을 이뤄낸 위업, 이 나라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다 문득 다가온 질문 하나.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삼성과 이건희회장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전시장 한켠에 이건희 회장(1942-2020)에 대한 짧은 동영상이 있었다.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에 드러낸 그의 생각도 일부 담겨 있었다.


“문화적 특성이 강한 나라의 기업은 든든한 부모를 가진 아이와 같다.”


“과거에 우리가 무엇 무엇을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느니, 서양보다 몇 백년이나 앞섰다느니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바로 오늘 우리 문화의 색깔이 있는가, 세계에 내세울만한 우리의 문화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업 활동이 세계화 할수록 오히려 문화적 차이와 색깔은 점점 더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된다. 전통 문화의 우수성만 되뇐다고 해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정말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문화적인 경쟁력이 생기지 않을까 한다.”


WOW! 20세기 말에 이미 그는 K-Pop을 앞세운 한국 문화의 폭발적 르네상스를 예견하고 준비했던 선지자가 아닌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위상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렸고 실행에 옮겼다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기업가로서의 천재성만으로 이건희회장과 삼성을 바라본 나는 치명적인 오독을 한 거다. 군부 독재와 공생해 성장한 거대 자본으로만 삼성을 이해해 온 관점의 협소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의 시야 협착은 몰이해와 맞물려 있었다.


사실 나를 포함해 대개의 한국인들은 삼성에 대해 묘한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 평소 삼성을 헐뜯고 비판하는 이들도 아들딸이 삼성에 입사하기를 내심 바란다. 그 뿐인가. 삼성전자의 세계적 성공이 엄청 흐뭇하고 자랑스럽다.


단군 이래 최초로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갖게 해준 기업들 중 단연 빛나는 별인 삼성. 그 창업주와 2대 총수가 품었던 원대한 비전이 현실로 바뀌고 있는 이 시대를 우리가 참 기쁘게 산다. 우리의 DNA에 각인돼 버린 줄 알았던 민족적 열등감이 서서히 씻겨지고 어느덧 차오르고 있는 자신감!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으뜸 자산이다.


높은 문화 능력 없이는 앞선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음을 알고, 앞장서서 행동한 거인. 그 분의 안목에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다. 깊이 감사드린다. 이건희 회장은 2020년 10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많이 늦었지만 존경심으로 이제라도 작은 추모의 예를 갖추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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