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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Sep 24. 2021

생일엔 죽음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아

가을 소나기 속 걷는 양재천길, 낙엽 하나를 줍는다. 벌레에 먹혀 구멍 뚫리고 거무스레한 채로 붉은 벚나무 잎이다. 올 봄에 시작된 반 년 생애가 끝났다. 상처투성이 이력을 고스란치 몸에 새긴 채 낙엽은 홀연 떠난다. 나뭇잎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기나긴 우리들의 생애. 하지만 벚나무 단풍만큼 아름다운 엔딩이 가능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이 60을 넘어도 내 안엔 아직 너무 많은 감정들이 들끓어 소란하다. 허구한 날 공구와 수상한 장비를 사들이며 어질러대는 남편. 그 뒤꽁무니를 쫓아가며 집 안팎을 치우고 밥까지 해줘야 하는 건 날이 갈수록 억울하다. 아이들의 말 한 마디에 받은 상처나 자잘한 배신감을 의외로 삭히지 못하면서 태연한 척 하는 내가 우습다. 치솟는 아파트값에 오르는 혈압도 대책이 안 선다. 남들보다 자식 걱정을 안 하던 탱자파 모드를 후회하게 된 것도 아파트값 때문에 아들의 결혼이 힘들어진 현실을 뒤늦게 인식하고 난 뒤다.


친구가 나를 위로한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세상살이 근심걱정은 모두 도토리가 된다더라.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 모두, 땅 위의 욕망과 미련으로부터 초연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뒤죽박죽 조금 엉망인 채로, 불완전한 채로, 지금 여기를 신나게 살아내면 될 일. 근데 절대로 쉽지 않다. “있는 그대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그건 뼈를 깍고 피를 말리는 고행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반드시 다른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지상의 하루하루가 ‘이번 생의 종착역‘까지의 여행이라는 것을. “Memento Mori!”


루마니아 북서부 서픈차(Sapanta) 마을엔 ‘즐거운 공동묘지 (merry cemetery)’가 있다고 한다. 무려 세계문화유산이라나. 마을사람들의 묘비에 각 개인이 살다간 스토리를 기록하고 떠나는 한 마디를 새겨놓았단다. “나는 푸줏간을 평생 지켰고, 마누라랑 투닥투닥 싸우면서 재밌게 살았어. 너희들도 나처럼 신나게 살다 가길 바래.” “나는 일곱 살 때 집 앞을 지나가던 미친놈의 차에 치여 죽었어. 너희들은 길 건널 때 차 조심하고 나 대신 오래오래 살다 오렴.”


죽은 이는 살아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축복의 말을 건네며 명랑하게 떠났다는 이야기다. 죽음을 칙칙하고 음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이건 정말 베껴 먹어야 한다. 우리 생애는 어쩌면 80 년짜리 여행 상품이 아닌가. 이것을 대박 나들이로 만들지, 허탕 선물상자로 만들지는 각 개인의 결단 또는 역량이겠다.


며칠 후면 생일이다. 이제부터 생일은 죽음을 생각해 보기 좋은 날이다. 이 행성에서의 남은 여정을 웃는 얼굴로 걸어가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힘차게 외쳐본다. “Happy Birthday to Me!”  실컷 자축해야지.  평범하면서도 각자의 방식대로 조금씩 비범한 우리들의  생애를 스스로 기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축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내 목표인 자연사를 향해 명랑하게 이번 생을 완주해야겠다. 해피 엔딩은 당연한 결과임을 굳게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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