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급할미 Oct 09. 2021

두문불출의 맛

분당에서 대구 평광동 골짜기 집으로 가을 여행을 오신 95세 친정 엄마, 밭일이 많아서 가을을 좋아하신다. 들깨를 털고, 시금치밭 잡풀을 뽑는다. 대파와 쪽파를 사 와서 윗동을 자르고 심는다. 한 달 전 내가 사다 심은 배추들을 몹시 총애하며 퇴비를 준다. 5년 전부터 청각 장애가 심해지신 후 텃밭 흙놀이에 더 마음을 붙인 것 같다.


엄마를 혼자 집에 남겨두고 외출하기는 좀 불안하다. 그러니 더불어 두문불출의 날들이 이어진다. 편안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게 은둔적 소질이 많았었나. 호박잎을 데쳐 갈치속젓을 곁들이는 호박잎쌈, 오징어뭇국이랑 두부부침까지 차려내면 근사한 점심이 된다. 온갖 쌈을 좋아하는 엄마라서 맛있게 드신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오후는 심심하다. 카톡 하나  안 온다. 이웃들도 늦더위에 낮잠을 자는지 도무지 기척이 없다. 시력이 나빠졌다는 핑계로 책 읽기를 내팽개친 지 오래인 처지. 그럼 뭘 하지?


 세상에 완전히 잊혀진 듯한 느낌이 스멀스멀. 서울과 사람들은 아득하다.  막막하다. 한편으론 왠지 편안하다. 심지어 홀가분하다. 이건 존재감 제로인 인간에게만 허락된 자유랄까? 세상살이와 사람들의 인정에 연연하던 시절엔 맛보지 못한 경지가 아닌가. ‘미친 존재감’을 지닌 자가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일 테니까. 두문불출의 날들이 이렇게나 즐거워지고 있다니. 신기하고 기쁘다.


친정엄마에게 오일장 나들이는 놓치면 손해인 행사다. 5일과 10일, 남편까지 셋이서 차로 10분 거리 불로동 시장에 간다. 칼국수나 갈비탕으로 점심을 해결한 다음 온갖 한눈을 팔며 흙땅콩이며 간고등어, 도토리묵이랑 두부를 산다. 활짝 웃는 할머니가 파는 홍시는 여섯 개에 3천원. 근데 홍시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절로 웃음이 터진다. 자기 집 마당에서 따온 게 분명하니 꼭 사야할 아이템이 아닌가. 모든 채소와 과일 값은 서울 마트랑 비교하면 지나치게 싸서 매번 충격받는다. 생산자 직판의 재미!


이른 저녁을 먹고 서둘러 설거지를 한다. 해질녘, 멧돼지 패밀리가 저녁 먹으러 나오기 전에 골짜기 한바퀴를 휘리릭 다녀와야 한다. 이건 엄마와 함께 하는 데일리 루틴.


 여느 시골처럼 멧돼지는 평광 골짜기에서도 골치 아픈 친구다. 어제 새벽 2시경 잠 깨어, 별 보러 마당에 나섰던 남편, 20 미터 저편 엄청난 몸집의 멧돼지 한 마리를 봤단다. 자동차 라이트를 켜서 쫓으려 했으나 꿈쩍도 안하더라나. 사진이나 찍어볼까 스마트폰을 꺼내는 새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는 이야기. 도무지 겁 없는 남편의 태도가 멧돼지의 출현보다 더 경악스럽다.


얇은 어둠 속 골짜기 양옆 사과밭의 사과나무들을 우러러본다. 좀 안쓰럽다. 주렁주렁 매달린 볼 빨간 알맹이들 때문에 허리 통증이 심할텐데 어쩌나. 가지가 부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평광 사과는 큰 일교차 덕분에 맛있기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명성 속에는 어마무시하게 투하된 비료, 과도한 생산성을 기대하는 사과 농민들의 욕심이 들어있게 마련.


30분 남짓한 산책 도중 엄마는 작은 낚시 의자를 펴고 서너번 쉬어야 한다. 그래도 가을밤의 마른 나뭇잎 냄새가 좋다고 코를 벌룸거리신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유튜브로 최애 프로그램인 <가요무대> 두어 편을 보면 엄마의 오늘은 끝난다. 트롯 맛집이 된 유튜브가 효도 대행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밤! 95세 엄마의 하루하루가 가을 햇볕처럼 기분 좋은 상쾌함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빌어본다.

작가의 이전글 오, 심수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