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어질리우스 할배의 일격
by
B급할미
Nov 23. 2021
퇴직 후 가열차게 사들인 공구와 장비로 집안팍을 마구 어질러대 내 염장을 지르는 남편. 오늘은 망원경을 하나 꺼내 마당 풀밭에 늘어놓는다. 그의 오만가지 취미 중 하나인 하늘멍을 때릴 참인가.
미세먼지로 뿌연 날씨는 아랑곳 없는 모양. 태양의 흑점들을 관찰한다나 어쩐다나. 오후 내내 친애하는 망원경 옆에서 꼼짝 하지 않는다. "저녁밥 먹어요"라는 내 외침에 마지못해 집안으로 들어온다.
돈 많기로 손꼽히는 월드 클라스 부자들이 뻐기며 탄다는 우주 여행선이 최근 화제가 아니던가. "부자들은 왜 그리 용감하죠? 우주 여행이 아무리 멋지다해도 폭발할 지도 모르잖아요. 난 무서워서 못 탈 것 같아."
겁 많은 내 말에 하하 웃던 남편, 불쑥 말한다. "이 지구 자체가 이미 거대한 우주선이 아니겠소? 망원경은 우주선 지구호에 난 작은 창문같은 거고. 그러니까 우린 날마다 끝없는 우주 공간 속을 비행 중인 거지."
윽, 모처럼 쏘아올린 주옥같은 한마디! 밤이고 낮이고 들여다본 우주 공간 속 한점 먼지인 인간 존재의 의미를 철학하고 계셨던가. 모처럼 그가 괜찮아 보이는 순간이다. 좋아. 이 기념으로 앞으로 일주일 동안 그가 어질어대건 말건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겠어.
keyword
우주
망원경
남편
58
댓글
9
댓글
9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B급할미
내세울 것 하나 없는 30여년 직장생활을 떠나 동네건달 할미로 살고있음. 관심사는 혼자 놀기 능력 배양법. <일주일에 세번 동네문화센터에 놀러갑니다> 출간 2023 세미콜론
팔로워
295
제안하기
팔로우
작가의 이전글
결혼 아니고 딸의 독립기념일!
골짜기 국수주의자의 점심
작가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