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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Jan 12. 2022

동네 건달할매 추가요!

게으른 김에 로봇청소기를 사서 한껏 더 게을러지는 게 올해 목표다.


 독거노인이 된 지 두 달! 내 경우, 60대 부부와 비혼 30대 둘로 이뤄진 일가족 네 명이 세 개 도시에 뿔뿔이 흩어져 산다. 아들이야 직장 때문에 평택에 산다지만 60대 남편과 내가 서울과 대구에 나눠 사는 건 좀 수상하게 여기는 시선이 있다. 뭐, 일반적이지 않다나. 상관없다.


 회사원 딸이 반전세 아파트를 얻어 떠난 뒤 살짝 ‘빈둥지 증후군’이 스쳐 지나갔다. 두 달 만에 웬만큼 적응한 듯. 외롭고 자유로운 하루하루가 느긋하다. 아침 출근하는 딸을 의식하지 않게 되니, 한껏 게을러진 1인 가구랄까. 누룽지든 토스트든 내 맘대로 아침밥을 먹는다. 다음은 커피와 함께 종이신문을 읽는, 고전적인 모닝 루틴이다. 중국어 복습과 예습을 한다. 입력되자마자 사라지는 단어들과 씨름하는 시간이다.


 점심이나 커피 약속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다. 양재천을 한 시간 걷고 간단한 장보기를 한 뒤 집으로 돌아온다. 숙제로 읽어야 할 책 <코스모스>가 눈에 띈다. 책을 받기 전엔 이렇게 두꺼울 줄 몰랐다. 색인까지 합해 무려 719쪽. 한숨이 나온다. ‘오디오북’으로 내용 요약 강의부터 들어볼까. 나빠지는 시력은 좋은 핑계다.


 책을 던지고 소파로 간다. 근데 털썩 앉기만 하면 거의 눕게 되는 건 뭐지? “누가 소파를 앉으려고 사니? 누으려고 사지.” 느닷없이 떠오른 광고 카피에 웃음이 터진다. 딱 내 이야기라서다. 누운 김에 저녁 메뉴를 구상한다. 만두를 구워볼까. 오랜만에 프라이드 닭날개를 주문할까. 아님 김치볶음밥? 내일 아침은 또 뭘 먹지?


 가만, 이건 너무 태평한 거 아냐? 지구적 역병이 좀체 잦아들지 않는 난세에 나만 혼자 유유자적하는 건 좀 켕긴다. 그렇다면 60대 후반 독거노인의 표준형 라이프스타일 내지 마음가짐은 뭐지?


 나를 포함한 베이비부머들은 ‘밥값을 하라’는 압력을 받으며 60년을 살아왔다. ‘최선을 다하라’는 구호 또한 끝없는 스트레스 유발자였다. 우리보다 더 헝그리 세대였던 부모의 기대와 격려도 베이비부머들을 끝없이 달리게 한 엔진이 아니었나.


 그 덕분에 퇴직 후에도 베이비부머들은 스스로를 겁박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뭔가 해야 지. 안 그러면 난 쓸모없는 인간이야.’ 그 결과 충분히 쉴 권리가 있는데도 쉬지 못한다. 할 일 없이 시간을 죽이는 데 죄의식까지 느끼기도 한다. 퇴직 후 놀 권리를 주장하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이들이 꽤 많다.


 누군가 우리 세대에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한 당신! 드디어 놀고먹을 권리를 획득하셨습니다.”라고. 까짓 밥값을 더 이상 못하더라도 괜찮아. 주장할 권리, 우리에게 있다고 본다.


 존재감 제로의 심심한 하루하루 속엔 뜻밖에 사소한 즐거움들이 있다. 연보랏빛 새벽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봄날 길 옆 노란 애기똥풀이 어떻게 피어나는지를 지켜보는 일이다. 베이커리 앞을 지나다 빵 굽는 냄새와 커피 향기에 코를 벌름거리는 재미도 있다. 일상의 시시한 즐거움의 순간들은 사실 무궁무진하다. 그것들을 발굴해내는 재미, 괜찮지 않은가?


 내 인생이 꼭 남들만큼 행복해야 되는 것도 아니다. 행복하면 물론 좋겠지. 하지만 쓴맛이야 말로 인생의 진짜 맛이라던 인생 대선배의 말씀이 생각난다. 쓴맛 단맛 짠맛 매운맛을 골고루 풀코스로 맛보는 게 진짜 인생이라던 그분. 멋진 관점이다.


 굳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고 적당히 게을러도 되는 날들이 눈앞에 있어서 기쁘다. 동네 건달할매로 발랄하게 살아갈 새해! 엄청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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