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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Mar 04. 2022

90세의 관점이 궁금해

어깨 스트레칭 휠을 돌리는 장모님과 사위

 오랜만에 분당 친정집에서 엄마랑 점심을 먹는다. 엄마랑 함께 사는 내 남동생 내외는 외출 중, 집안은 고요하다. 오후는 엄마의 산책 시간. 봄바람 살랑 부는 탄천 산책로에 남편이랑 따라나선다. 둘째 딸과 사위를 앞세워 신이 난 길례씨, 96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꼿꼿하고 또박또박 걷는다.


 멈춰선 곳은 산책로 곳곳에 놓인 운동 기구들 앞이다. 스테퍼에 조심스레 올라 힘껏 구르듯 걷기를 3분, 큰 바퀴를 돌리는 어깨 스트레칭에 3분, 자전거 타기 3분. 잠시 벤치에 앉아 쉬며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걷는다. 또 다른 운동 기구들도 여럿 조금씩 해본다.


 “탄천이나 동네공원에 운동 기구가 많아서 너무 좋더라. 나이 들면 근육이 빠져 너나없이 몸이 흐물흐물한데, 장딴지나 허벅지 근육을 조금이라도 되살리고 싶거든.”


 진심 공감되는 부분이다. 나이 65를 넘은 후 근육감소증이라는 위태로운 경지를 시시각각 실감 중인 나! 운동기구 러버인 장모님을 따라 탄천 운동 기구들을 듬뿍 체험한 내 남편은 길례씨의 건강 관리능력을 칭송한다.


 “운동기구 설명을 열심히 읽으시네요. 그대로 따라 하시는 모습, 참 보기 좋으십니다. 안 해본 것에 도전하는 것도 멋지고요. 동급최강 장모님, 엄지 척!”


 청각 장애가 심해져 사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울 엄마, 그래도 환하게 웃으신다. 청각 장애 때문에 매사에 소심해지셨지만, 호기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돈 안 드는 건강관리 비법, 딸인 내가 전수받아야 할 처지다. TV를 보면서도 발끝 부딪치기를 하며 노인복지관에서 배웠던 깨알 건강 팁을 실천하는 길례씨.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를 놀려댔다. “엔간히 애쓰시네. 적당히 하세요. 지나친 건강은 인간을 겸손하지 못하게 만든 다니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 저절로 알게 됐다. 이제 엄마의 운동은 아들딸의 복지를 위한 분투라는 것을. 내가 겪지 않았으면 절대로 이해 못했을 사실이다. 길례씨가 제일 두려워하는 건 자신의 장수로 자식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될 미래. 또 하나 무서워하는 건 어느 날 거동이 부자유해져 요양원으로 가야만 할 날이 오는 거다.


 “요즘 밤마다 부처님께 딱 하나만 기도해. 잠 자다가 세상 떠나게 해달라고. 그것 말고는 다른 소원이 없어.”


 당분간 길례씨의 소원이 이뤄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나 뿐인 소원을 못 이룬 아침에도 엄마는 웃으면서 일어난다. 아침 스트레칭을 하고 모닝 루틴인 신문 읽기를 끝낸 후 아침을 드신단다. 봄부터 가을까지 거의 날마다 찐 옥수수나 떡 도시락을 들고 동네 공원으로 나홀로 소풍을 간다. 벤치에 앉아 불교 책을 읽고 운동기구 순례 일정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눈물 나게 예쁜 봄”을 또 한 번 맞게 된 엄마. “들여다볼수록 봄꽃들이 기특해. 약하고 작은 것들이 겨울을 견뎌내고 연두 빛 이파리를 밀어내는 걸 봐라. 세상에 제일 힘센 건 바로 봄이야.”


 90대 엄마의 느릿느릿한 일상의 궤적을 따라가면 그곳에 미래의 내가 보인다. 머지않아 다가올, 내 70대와 80대의 날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 알 수 없는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우게 될 것인가?


 길례씨가 말한다. “몸은 해마다 늙어가고 낡아가도, 오는 봄은 모두 새 봄이더라. 이런 봄날에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오늘이 너무 좋다. 특별히 바랄 게 하나도 없어.”


 아찔하다. 특별히 바랄 게 없어져 마침내 얻은 자유로움. 평생 원망스럽던 엄마 남편의 기억마저 이미 전생처럼 아득해진 게 분명하다. 그 누구의 도움도 아닌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룩한 평화. 엄마는 스스로 행복이라는 자가 발전기를 돌려 지금 이 순간, 존재 자체를 누리고 계시다.


 경축! 이 행성에서 박여사의 96번째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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