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태어나 어느덧 생애의 가을로 접어든 내게 가을은 특별하다. “Happy Birthday to Me!”를 외치며 배낭을 둘러멘다. 내 자신에게 주는 이번 생일 선물은 2박3일 여행.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를 알고 싶으면 내가 맨 처음 있었던 곳으로 가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수서역에서 srt를 타니 눈 깜짝할 새 광주송정역 도착. 숙소는 숙박앱으로 예약한 금남로 4가의 게스트하우스다. 싱글룸 2박에 9만원. 깨끗해서 마음이 놓인다. 내가 졸업했던 여중을 기웃댄다. 본관 앞 키다리 히말라야 시다들의 여전한 자태, 왠지 안도한다. 근처 대인시장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는다. 꽈리고추조림이랑 콩자반 밑반찬에 대한 옆 손님들의 다정한 품평에 끼어들어 함께 하하호호!
십여 분을 걸어 아시아문화전당으로 거듭난 옛 전남도청 부근 벤치에 앉는다. 꼭 혼자 오고 싶었던 곳이다. 그냥 먹먹한 느낌, 선글라스에 두 눈을 감출 수 있어 다행이다. 곧장 09번 버스를 타고 무등산으로 향한다. 국립공원으로 위엄 상승한 무등산. 등급을 매길 수 없이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뜻하는 이름이라지. 사람과 사람 사이 등급 같은 건 없다는 은유로도 해석된다니, 어느 편이든 아름답지 않은가. 산길에 있는 의재 허백련미술관을 둘러본다. 증심사 경내에 쏟아지는 가을 햇볕이 고요하다. 언젠가 템플 스테이를 해봐야겠어.
다시 시내를 쏘다니다가 이름에 꽂혀 불쑥 들어간 비움박물관. 저쪽에서 함박웃음 띈 예쁜 언니 한 분이 걸어온다. 혹시 아는 분인가?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터라 살짝 불안해진다. “2층 다 보고 나면 5층부터 다시 내려오면서 수장고까지 둘러보세요.” 친절한 안내자는 바로 이영화 관장님. 근데 입구에 서있는 푸세식 ‘똥항아리’부터 하얀 밥사발, 베개 자수, 함지박, 요강, 떡살, 흙손, 등잔대, 인두, 다리미, 필통, 책상...,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1인 컬렉션의 어마어마한 양에 압도당한다.
그녀가 평생 모은 온갖 생활용품들이 바로 비움박물관의 미술품이다. “1970년대 초, 농촌근대화 명분으로 새마을운동이 불타오를 때 우리 모두가 앞 다투어 내다버린 옛 물건들이예요.” “근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쁘고 기특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살림살이 물건들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겸손하게 뿜어내고 있다니까요.”
정말이다. 나무를 그저 무심히 깍아 만든 것 같은 목기, 찬합, 물레와 쥐덫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일정한 미학적 높이에 도달했다는 걸, 왜 예전엔 몰랐지? 그녀의 위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더 돋보이게 할까? 아무도 의뢰하지 않은 숙제를 나 혼자서 끙끙댄다.
아무래도 광주광역시가 나서야겠지. 민속생활사박물관을 만들어 집과 마당, 논밭을 갖춘 현실 공간에 배치해야만 그녀의 물건들은 비로소 제 빛을 발할 것이다. 스토리텔링이 있는 생활밀착형 박물관이 탄생해주면 관람객들이 저절로 모여드는 핫 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심하게 감동 먹은 나머지, 관장님을 우발적으로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그 결과, 그만 관장님과 친구 두 사람의 예정된 저녁식사에 염치불구 끼어들게 됐다는 것. 관장님의 단골 갈치조림 식당이다. 무와 감자가 수북이 깔린 조림 속 갈치 토막들이 어찌나 튼실한지, 갈치로 배를 꽉 채운 저녁이 된다.
고향 나주는 광주에서 시내버스 권역이다. 친척들마저 서울로 광주로 뿔뿔이 흩어진 이곳에 굳이 와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 다만 닳아버린 영혼의 배터리를 충전하려는 무의식이 우리를 고향으로 끌어당기는 건가?
오전 9시, 마음이 급하다. 나주의 시그니처 푸드, 곰탕 한 그릇을 먹어야 비로소 나주에 온 것이다. 읍성 내 곰탕집, 곰탕의 절친 묵은지와 깍두기가 차려진다. 새우젓 베이스의 서울 김치가 경쾌하다면 멸치젓 베이스인 전라도 김치의 바디감은 묵직하달까. 아아, 그러나 깍두기 속 가을무가 제대로 맛이 들었으니 모닝 막걸리를 주문할 수밖에. 아침부터 혼자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나의 흰 머리칼을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이 동네엔 나 같은 불량할미들이 별로 서식하지 않는 모양이다. 살짝 비틀거리며 해장 아이스커피를 마시러간다. 아, 참, 오일장 구경도 가야지.
내게 2022년은 여행 독립을 감행한 원년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다녀야 되는 줄만 알았던 여행. 하지만 혼자서 쏘다녀도 충분히 즐겁다는 걸 터득해 버렸으니. 작은 관문을 돌파한 성취감마저 발생한다. 또한 이 행성 최강의 치안과 잘 짜인 교통 인프라 덕분임을 어찌 인정하지 않겠는가. 천방지축 발랄한 내 행보를 붙잡는 게 없진 않다. 하루 두 시간 이상 걸으면 삐걱대는 60대 후반의 무릎과 발목이다. 하지만 그 한계 내에서 나는 충분히 자유롭다.
이박삼일이나 삼박사일로 몇 군데 더 다녀올 생각이다. 내 떠돌이 기질에 맞춰 동서남북으로 가려한다. 혼자여도 좋고, 친구들 이랑도 좋다. 한달살이도 차차 계획하려 한다. 나 홀로 제정한 가을방학에 스스로 흐뭇하다.
클릭만 하면 단군 이래 최고로 풍부해진 여행 정보가 쏟아지는 요즘이다.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을 위한 노매드헐(nomadher) 같은 앱이나 여행커뮤니티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여성 전용 게스트하우스 같은 숙박 시설도 찾아보면 꽤 있다. 중·노년 여성의 경우, 혼자 떠나는 여행에 느끼는 쑥스러움만 집어 던지면 여행 독립은 쟁취 가능하다.
누구나 자신이 만난 사람들과 책들로부터 배우고 성장한다. 내겐 영화랑 여행까지도 그렇다. 여행은 내가 살아있음을 기쁘게 느끼게 해준다. 여행 중 낯선 이의 따뜻한 눈빛을 만날 때 더욱 그렇다. 여행 덕분에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에 굳이 목적이 있다면 인생을 하나의 과정으로 온전히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집을 떠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