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여동생네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강북 도심에 사는 여동생 내외가 차를 가지고 왔다. 분당에서 친정 엄마까지 픽업해 농막이 있는 부여군 내산면으로 출발. 도시를 벗어나니 곧장 황금 들판이다. 올해도 맛난 햅쌀밥을 먹을 수 있겠군. 기분이 좋아진다. 농경시대였던 1950년대 곡창지대에서 태어난 자의 원초적 안도감이다.
도착하자마자 준비해온 친정 엄마표 찰밥이랑 김치로 점심을 먹는다. 동네 고라니들의 입맛에 딱 맞는 고구마 잎들을 사수하기 위해 쳐놓은 펜스 안, 고구마 밭에 들어선다. 먼저 비닐 멀칭과 제초용 부직포 매트를 걷어낸다. 오늘 휴가를 낸 제부가 예초기로 고구마 줄기를 벤다. 막내랑 나는 고랑 옆으로 치워낸다. 모두 일곱 고랑 중 오늘과 내일, 이틀간 다섯 고랑을 캐야 한다. 나머지 두 고랑은 조만간 제부네 고교 동창 다섯이 일박이일로 울력 바비큐 이벤트를 갖기로 했다나.
작업은 이인일조로 진행된다. 삽질러가 먼저 삽질을 해놓으면 호미질로 살살 뒤져가며 고구마를 캐는 방식이다. 막내네 아들은 내일 합류할 예정이다. 첫날은 제부 혼자 삽질을 하기 때문에 진도를 많이 나가지 않기로 한다. 울퉁불퉁한 고랑에 엉덩이 방석을 끼고 앉아 호미질을 하는 내가 영 어설픈 모양. 친정 엄마가 시비를 걸어오신다. “그렇게 호미질을 냅다 하지 말고 살살 해봐. 네 호미에 자꾸 고구마가 찍혀버려 아깝잖아.”
맞는 말씀이다. 땅속 고구마 줄기가 어디로 뻗쳐있는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농사 무식쟁이인 나. 조심성 없는 호미질에 토막 난 고구마들의 비명이 들릴 지경이다. 하지만 내 허리도 비명을 지르긴 마찬가지다. 일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왜 이리 허리가 끊어지는 거야?
나와 달리 친정 엄마는 밭에만 오면 생기발랄하다. 엉덩이 방석과 혼연일체된 자태에 부드럽게 흙을 헤쳐 가며 고구마 살을 거의 다치지 않는 호미질 신공까지. 캐 올린 빨강 고구마를 마치 금덩어리 보듯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길을 보면 정말 본투비 농부다.
햇볕은 나한테만 따가운 건가? 찬물을 마셔가며 안간힘을 쓴다. 벌레를 피하느라 긴팔과 토시까지 껴입은 덕분에 등짝엔 땀과 진땀이 흐른다. 해가 질 때쯤에야 작업이 끝날 것 같은데 이걸 어쩌지? 밭고랑에 퍼질러 눕고 싶은 찰라, 가을 햇볕과 바람을 듬뿍 받으며 환하게 웃는 엄마 옆얼굴이 보인다. 벼락처럼 한 생각이 다가온다.
“그래, 오늘 같은 10월의 멋진 날에, 아무나 96세 친정 엄마랑 고구마를 캐는 행운을 누리진 못할 거야. 더구나 고관절, 무릎관절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96세 친정 엄마를 가진 딸은 대한민국 5퍼센트에 드는 거 아닌가?” 고구마 밭 깨달음의 순간이다. 너무 좋아서 실실 웃는다. 엄마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쏴본다. 호미질이 아까보다 조금 수월해지고 허리 통증도 견딜만하다.
이번 부여행의 내 담당은 부엌. 자잘한 조기를 굽고, 오징어김치전 부침개를 만든다. 아욱국에 김으로 후다닥 차려낸 저녁밥상에 둘러앉는다. 다들 입맛이 좋다. 좁은 싱크대에서 꼼지락거리며 하는 설거지는 소꿉장난이다.
둘째 날 도착한 막내네 아들까지 삽질을 시작하자 작업은 한 나절 만에 끝난다. 휴~ 살 것 같다. 작황은 예년에 못 미친다. 막내 부부는 실망하지 않는다. 극심한 봄 가뭄에 이어 과도한 여름 비 때문이려니. 내년을 기약하자고 씩씩하게 말한다.
민망한 건 제대로 펴지지 않는 내 허리. 불과 세 시간도 못되는 노동에 “아구구~”를 연발하며 낑낑댄다. 문득 어기적거리며 걷는 농촌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평생 쪼그려 앉은 노동으로 허리가 굽고 고관절이 망가져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그녀들. 척추 통증을 참아낸 무한 인내심이 빚어낸 뼈와 관절의 이상 변형이겠다. 관찰해 보면 농촌 남성 노인들의 하체 근골격계 변형은 여성 노인들만큼 심하지 않다. 쪼그려 앉아 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리라.
우리 모두가 오뉴월 뙤약볕에 콩밭을 매고 고구마를 캐고 양파를 캐낸 여성 노동의 수고에 빚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마트에 진열된 양파랑 고구마, 감자를 경건하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또 하나, 고구마를 캘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그건 바로 고구마 값이 비싸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 거다. 고구마뿐이 아니다. 쌀과 보리, 감자와 배추, 무, 그리고 과일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의 땀방울이 없이 수확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걷어낸 제초 매트를 다시 착착 접어놓고 작업은 마무리된다. 꼼꼼히 씻어내도 손톱 속에 흙이 끼어있다. 즐겁다. 빡센 하루의 인증 같아서다. 이제 뜨뜻한 허리 찜질로 꿀잠을 자는 일만 남았다.
고구마 울력은 셋째 날 배달 서비스로 이어진다. 막내는 분당과 서울에 사는 친정집 독수리 5남매에게 고구마를 골고루 나눠주는 즐거움을 올해도 포기하지 않겠다나. 고구마 밭 옆에서 자란 땅콩, 토란에다 빨강 고추, 깻잎, 호박, 부추랑 가지까지 5팩으로 나눠 담는다. 부여 이웃들이 가져다 준 밤도 곁들인다.
우울증 치료를 받으러 병원 다니느라 더 우울해졌다는 친구가 떠오른다. 내년 봄에 한 뼘 텃밭을 임대해 보라고 권해볼까. 아파트살이에 싫증났지만 전원주택은 관리가 어려워 엄두가 안 난다는 그녀다. 가까운 주말 농장에 서너 평짜리 한 구좌만 임대하면 얼마든지 텃밭 농민 놀이가 가능하지 않은가. 무언가를 심고 가꾸는 일이 약물보다 더 치유력이 클 수도 있을 테니까.
언젠가 북촌 골목길을 걷다가 화분 텃밭을 만났던 적이 있다. 작은 화분에 심어놓은 상추, 고추, 깻잎, 토마토가 봉숭아랑 맨드라미랑 올망졸망 자라고 있었으니. 자칫 쓰레기 투기를 부르기 십상인 틈새 공간에 확보한 게릴라 가드닝의 실속 만점 버전이랄까. 그 골목 이웃들 간에 화분 텃밭의 꽃들과 채소를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봄부터 가을까지 오고갈까?
이도 저도 안 되면 햇볕 잘 드는 아파트 베란다에 바질이나 대파 화분 하나를 들여놓는 방법이 있다. 밥 하다가 대파 한 대 쓰윽 뽑아 된장찌개에 썰어 넣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반려 로즈마리, 반려 방울토마토 화분 하나가 주는 작은 기쁨을 더 많은 이들이 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