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이미 컴컴한 초저녁에 문 두드리는 소리. 혜숙씨다. 도토리묵 한 접시를 불쑥 내민다. “이거, 대모산 도토리로 내가 만들었어. 마트 도토리묵보다 조금 쌉싸름한데, 맛이나 보라고.”
이런 횡재가! 일부러 주워 모은 도토리는 아니란다. 혜숙씨의 주말 텃밭이 대모산 기슭에 있는 덕분이다. 주변의 숲에서 굴러 떨어진 도토리 한 양재기 분량을 모아 만들어 본 거라나.
홈 메이드 도토리묵을 도대체 어떻게 만들까? 먼저 망치로 하나하나 도토리를 쪼개 겉껍질을 벗긴단다. 믹서에 갈아 물에 사흘 담가 둔다. 가라앉은 전분을 따라 내어 40분간 계속 저어가며 끓이면 완성. 내겐 그저 험난하게만 보이는 수제 도토리묵 제조 과정이 그녀에겐 재미난 놀이라니.
서울 한복판에서 탄생한 수제 도토리묵에 대해 마땅한 예를 갖춰야겠지. 부랴부랴 멸치 다시마 육수를 낸다. 길게 채 썬 도토리묵에 채 썬 신 김치, 적양파랑 김가루로 토핑한 후 뜨끈한 멸치국물을 붓는다. 우와, 황홀한 이 맛!
혜숙씨는 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라인에 같이 산다. 동갑나기라는 걸 알고 난 후 서로에게 지리적 최측근이 돼버린 지 십년 째. 부스스한 머리로, 소파에 누워있던 옷 그대로 오르내릴 수 있는 편한 사이란 뜻이다.
놀랍게도 그녀는 진짜 전업주부다. 거의 멸종 위기에 처한 직종이 아닐까 의심되는 이 시대에 태연하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성실녀다. 먼저 김치 담그기, 그 까짓 거 하나도 안 귀찮다니. 열무김치, 얼갈이김치, 파김치, 물김치, 오이지에 직접 김장까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해치운다. 그것도 임대 텃밭에 직접 기른 배추와 무로.
혜숙씨는 경남 의령, 종가집 맏딸로 태어났다. 남편 직장 따라 지방에서 살았던 덕분에 여러 도시에 친구들이 있어 지금도 왕래한다. 그 결과 혜숙씨에게 친구들이 보내는 쪼삣고기라는 민어 조기부터 단감, 매실청과 장아찌, 상추와 옥수수, 참기름, 들기름이 답지한다. 손 큰 그녀는 뭐든 내게 한 움큼 나눠준다.
그 뿐이 아니다. 그녀는 800여 가구가 사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된장 간장 고추장을 직접 담는 주부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파트 구조 상 장 담그는 큰일을 하긴 어렵다. 혜숙씨는 창원에 사는 절친 집에 가서 합동으로 된장 간장 고추장을 담가 온다. 그 덕분에 나는 이 나라 동남부권의 햇빛과 바람 품은 된장 간장 고추장을 듬뿍 맛본다. 살림의 여왕 곁 최대 수혜자인 셈이다.
혜숙씨는 조금 멀리 사는 손녀의 공동 육아 담당이기도 하다. 유치원이 끝나면 손녀를 픽업해 학원 셔틀을 해준다. 아들과 며느리가 퇴근할 때까지 손녀를 돌보고 저녁을 먹인다. 가끔 우리끼리 갖는 치맥 타임에 황혼 육아의 고달픔을 살짝 토로하는 그녀. 나이와 함께 낡아가는 몸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족에 대한 굳건한 책임감을 저버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그녀! 평범한 겉모습 속에 지닌 비범함,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시도 때도 없이 혜숙씨가 가져다주는 온갖 텃밭 채소를 나 혼자 먹긴 아깝다. 귀한 가을 상추는 봄 상추에 비해 억세지만 씹는 맛이 있다. 나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 사는 다른 친구들 집 문고리에 조금씩 걸어둔다. 그걸 받은 친구들은 또 직접 만든 버섯볶음, 친정엄마 파김치나 홈메이드 멸치젓갈을 가져온다. 경북 경주 시댁에서 온 쌀이나 경남 고성 시엄마표 묵은지도 서로 간에 멋진 답례품이다. 나는 신이 나서 이집 저집 배달 셔틀을 뛴다. 처음엔 얼굴을 모르고 엉겁결에 받아먹다가 어느 시점엔가 만나서 함께 밥을 먹는다.
몇 년 째 오고 가다보니 어느새 음식 나눔 네트웍이 생겨났다. 특히나 코로나 격리 방역기에 위력을 발휘한 상호 공급망이랄까. 평창에 세컨 하우스가 있는 친구는 강원도 고랭지 배추를 한 통씩 나눠준다. 수제 딸기잼, 오디잼, 오이지랑 고추 장아찌도 오고간다. 때론 염도 조절에 실패한 무 피클을 차마 버리지 못해 나눠 먹는 고통분담 상황도 발생한다.
제일 기대되는 건 역시 김장 시즌이다. 창원과 부산, 경남 고성과 파주, 평창과 경주 스타일의 김장김치가 총망라되기 때문이다. 시댁과 친정 뿐 아니라 비혈연 자매들 간 김치 택배가 오가는 8도 김치 잔치랄까.
올해는 내가 수육을 삶아 김장 나눔 점심을 주최해 볼까. 각자 획득한 김장 김치를 조금씩 들고 와 나눠먹고 바꿔먹는 재미를 더 크게 하고 싶어서다. 모이스처 크림도 하나씩 돌릴 생각이다.
일교차가 커지는 늦가을이라 배추가 달달해진 요즘. “배추전이 먹고 싶군.” 생각을 하는 차, 다시 혜숙씨가 문을 두드린다. 여지없이 배추전과 가지튀김 한 접시를 건네주고 번개처럼 사라지는 그녀! 천하무적 주부 혜숙씨와 동네 자매님이랑 연결된 이 느낌! 추워질수록 더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