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자기 성찰이 유행하는 12월이다. 한 친구는 계획했던 한달살이 여행을 팬데믹 우려증으로 놓쳐버린 아쉬움을 토로한다. 다른 친구는 딸과 대판 싸운 후 관계 회복이 잘 안 된다며 묘책을 구한다. 세 번 째 친구는 이태리 요리 강좌를 등록했다 취소한 게 후회된단다.
커피에 곁들인 초코칩 쿠키의 촉촉하고 바삭한 맛에 정신없이 빠져들던 내 차례다. 하지만 반성에 전혀 조예가 없는 나. 도대체 뭘 후회해야 하지? 이럴 때는 공격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친구들아, 평생 반성만 하다 훌륭하게 죽을 거냐? 각자 셀프 칭찬 좀 해봐.”
다들 은근 재밌어 하는 표정. 앞 다투어 입을 연다. “난 뜨개질이랑 포장을 되게 잘 하잖아. 예전에 우울증 덕분에 지하상가 털실 가게에서 뜨개질 과외를 받았거든. 11월부터 털모자랑 조끼를 세 개씩 만들어 놨어. 포장지랑 리본 테이프도 사놨고. 우리 손녀한테 주고, 시누이한테도 선물할 거야. 이걸 줄 때는 아이가 자라서 털 조끼가 작아지면 내게 다시 보내라고 말해줘야 돼. 손뜨개질 한 거라 풀어서 다시 크게 만들어 주는 A/S도 가능하니까.” 진짜 멋진 재능이다. 다들 엄지 척!
“난 요리가 젬병이야. 니들 알지? 근데 사람들을 우리 집으로 불러 모으는 게 취미잖아. 내 친구나 남편 친구 부부들이 올 때 대개 요리 한 가지씩을 가져 오더라. 직접 만들어 오거나 포장 음식이거나 간에. 그래도 명색이 호스트하는 입장이니까 내가 뭔가 하나는 만들게 돼. 지난 주말에 아들이랑 며느리 불러놓고 잡채를 만들다가 굴 소스가 그만 프라이팬에 쏟아져 대박 짜게 됐어. 다급해서 새송이 버섯이랑 파프리카 채썬 것을 마구 집어넣었지. 그래도 짜더라고. 그때 며느리가 말했어. 자기는 시엄마가 요리를 잘 못하는 게 너무 좋다고. 왠지 정다운 느낌이라고. 요리를 잘 못하는 시엄마가 매력 있다고 하는 며느리가 갑자기 너무 예뻐지는 거야. 너희들, 그 느낌 알겠지?”
그래서 그 친구는 며느리를 와락 껴안았단다. 그녀들의 남편들은 어리둥절하면서 기뻐했다는 거고. 뭔가를 잘 못하는 게 잘하는 것보다 더 상대방의 마음을 얻게 해준 경우다. 의도치 않은 허당 퍼포먼스로 드러난 허점이 그대의 매력 자산으로 쌓이고 있음을 알라!
우린 각자 자기가 저지른 실수로 남을 기쁘게 한 사례들을 발표하기 바빴다. 한 친구의 남편이 저녁을 먹으며 30대 후반 외동아들을 심하게 꾸짖고 있었다. 그 아들도 만만찮게 아버지에게 맞섰다. 친구는 불안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만 큰 접시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놀란 남편이 청소기를 밀기 시작했다. 물걸레 청소포로 마루 바닥을 조심스레 닦던 아들의 손가락에 깨진 접시의 파편이 하나 박혔다. 피가 흘렀다. 그 남편은 파편을 빼내고 소독을 해준 뒤 아들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줬다. 그리곤 모든 것이 다시 평화로워졌단다.
자랑질 배틀에 내가 밀릴 순 없지. 게다가 올해는 내 독거 원년이 아니던가. 지구살이 세 번 째 30년에 찾아온 뜻밖의 행운을 자축하는 행사를 벌였다. 최초로 단행한 나홀로 이박삼일 여행 이야기를 늘어놨다. 친구들이 내년에 꼭 시도해 보겠단다.
싱글 노년기,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결국 혼자 노는 능력이겠다. 혼자 맛있게 밥 먹고, 맛있게 영화 보고, 몰입할 무언가를 찾아내 실행하는 능력 말이다. 혼자 떠나는 여성여행자 전문여행사도 찾아냈다. 이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두 아이를 키워 낸 결혼 생활 38년 동안 쌓인 잡동사니를 조금씩 정리한 것도 자랑 목록에 있다. 덜 필요해진 물건들을 재활용 수거함에 넣거나 버리고 있다. 홀가분하다. 체중이 줄어든 느낌마저 든다. 30평대 집이 40평대로 넓어진 시각 효과는 덤이다.
자랑이 끝난 뒤 한 해를 되돌아본다. 올 해 유튜브와 더 친해졌다. 지상파와 종편 채널들을 끊다시피한 결과다. 내 최애는 <3프로 TV>의 위즈덤 칼리지. 그 외 플라톤 아카데미, 세바시와 영화 리뷰 채널도 본다. 못 가본 남아시아 자이나교도의 알몸 라이프스타일과 신앙 체계를 알게 된 것도 유튜브 채널 속 명강의를 통해서다. 자이나교도들이 낮은 인구 비율 불구하고 금융계 내 차지하는 위치라든지 힌두교 인구가 많은 인도의 정치지형 변화에 미치는 힘을 알려준 것도 유튜브 속 선생님이다.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라는 첨단 직종으로 부상한 송길영 선생의 강의는 빼놓지 않고 본다. 빅 데이터 판독가로서 그가 갖는 시각과 통찰은 사회 주류로 부상하는 20대와 30대들이 조직과 가족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세대별로 다른 경험치가 가치관을 갈랐다”는 그의 당연한 분석이 가족과 사회 공동체 속, 달라도 너무 다른 세대 간 갈등을 줄이고 상호이해를 늘리는 특급 촉진제로 보여 진다. 때때로, 아니 자주 MZ 세대 아들딸의 생각과 행동을 의아해하면서도 이해해야만 하는 베이비부머 부모의 관점과 인식을 확장하는 데 요긴한 강의다.
그리고 늦었지만 마침내 러시아를 만났다. 지난 가을 <러시아-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미술전>과 관련 강좌에 참여한 게 계기였다. 그저 스치듯 한번 다녀온 여행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나라였던 러시아. 그동안의 무관심이 무색하게 역사와 문학, 그리고 미술과 연극,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온 막심 고리키를 읽는다. 막심은 ‘최대’를 의미하고 고리키는 ‘맛이 쓰다’는 뜻이란다. 작가가 살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걸친 러시아적 삶의 쓴 맛을 최대한 글로 쓰겠다는 각오가 담긴 필명이다. 고리키 단편집 <가난한 사람들> 부록으론 블라디미르 레닌과의 인터뷰가 있다. 우리에겐 인명사전 속 인물인 볼셰비키 혁명가 레닌을 여러 번 만난 고리키의 회고담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내전에 대한 혁명가 레닌의 입장과 대조되는 회의적인 관찰자 고리키의 관점이 동시에 드러나는 글”이다. 러시아 노동자를 사랑했고, 잠든 러시아를 일깨운 강철 의지와 돌파력에 가려진 레닌의 인간적 온기도 작가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음을 숨기지 않는다.
겨울과 러시아는 잘 어울린다. 타박타박 걸어서 왕복 한 시간 거리인 동네 도서관도 좋다.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무지를 줄이기에 딱 좋은 나이 60대. 따뜻한 차 한 잔을 옆에 두고 체홉 단편을 읽는 지금 이 순간, 최고로 호사스러운 겨울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