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친구가 왔다. ‘코로나 은둔’후 처음이니 4년 만이다. 대구에 사는 친구 하나도 왔다. 여고와 대학을 함께 다닌 삼총사의 파자마 파티를 위해서다.
첫 끼는 가자미 미역국. 멀리서 온 친구들과 왠지 함께 먹고 싶었다. 진하게 우려낸 육수에 가자미 살을 발라내며 먹는 뚝배기 미역국, 이 땅에 태어난 여자들의 쏘울 푸드가 아닌가.
숲 속 작은 호텔에 체크인, 파자마 파티가 시작됐다. 밀린 이야기가 쏟아진다. 파리 친구는 현재 싱글. 파리 동역에서 기차로 30분 거리 교외, 마당이 있는 집에 산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몇 년 간 서울의 외국계 통신 기업에서 일했다. 나이 27세이던 1980년대 초반, 모아온 돈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몇 년 뒤 학위는 받았지만 학문에 그다지 큰 뜻이 없음을 깨달았다. 프랑스인 엔지니어와 결혼했고 한국 대기업의 파리 지사에 취직했다.
친구의 무기는 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 섬유로 시작해 여러 분야의 수출 업무를 담당하며 업계에서 ‘마담 조’의 명성을 쌓았다. 딸과 아들을 하나 씩 낳아 키웠다. 41년 동안 프랑스에 살지만 그녀의 국적은 한국. “굳이 바꾸고 싶지 않아서”였단다. 국적으로 인한 불이익은 별로 당한 적이 없다는 그녀.
결혼한 딸과 아들은 파리 동역 부근에 각각 집을 얻어 엄마 집에 오가기 쉽다. 친구의 변호사 딸은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 잔디밭에서 ‘공식’ 결혼식을 했단다. 물론 신랑, 신부는 뉴욕 주재 프랑스 영사에게 미리 날짜와 시간을 알렸다. 현장에 출동한 영사의 주재로, 두 명의 증인을 대동한 그들의 ‘공식적’ 웨딩은 거행됐다.
양가 부모를 굳이 청하지 않은 초소형 결혼식 이후 몇 달 만에 결혼 피로연이 열렸다. 파리 교외의 한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 양가 부모와 친지들, 그리고 친구들이 벌인 떠들썩 잔치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딸과 아들이 차례로 결혼했지만 그들의 집 마련에 부모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결혼 전 동거를 거친 경우가 많아 이미 살고 있는 집에 그대로 살기 때문이란다. 부모는 물론 결혼 축하금을 보내지만 액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아들·딸의 남부럽잖은 웨딩과 전셋집 마련에 가산을 탕진한 후 노후 빈곤에 허덕이는 한국형 부모 신세에 비하면 이런 보통 프랑스 스타일, 정말 부럽다.
친구의 딸은 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어린 외손자는 계약 관계인 유모의 집에 주중 아침마다 보내져 돌봄을 받는다. 초딩인 외손녀는 방과 후 학교 돌봄 시스템의 수혜자. 그러므로 외할머니의 강도 높은 황혼 육아는 없다.
게다가 사교육이 별로 없는 환경이라서 할머니의 방과 후 학원 뺑뺑이 서비스도 필요치 않다나. 그 덕분인지 황혼 육아의 직업병인 만성 허리 통증이나 무릎 관절염이 없는 것 같다는 그녀. 그래도 가끔 도움 요청이 오면 즉시 달려간다. 어린 손주들은 외할머니의 방문을 언제나 고대하기 때문이다.
퇴직 후 친구는 마당의 꽃을 가꾸며 프랑스 형 연금 퇴직자의 삶을 누리고 있다. 프랑스 퇴직 연금의 소득 대체율은 약 74 퍼센트. 삶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가드닝을 매개로 이웃사촌들과 교류도 활발하단다. 공부는 싫어하지만 책 읽기는 지금도 좋아한다.
새벽 2시까지 이어진 파자마 수다로 늦잠을 잔 우리 셋, 지하철을 타고 내가 사는 동네로 왔다. ‘가정식 백반’을 먹을 참이다. 콩나물, 도라지나물, 호박나물 3종 세트랑 고등어구이를 곁들인 된장찌개에 파리의 그녀는 대만족.
우리 집 소파에 누워 나른한 오후를 보낸 뒤 대학 동창 모임이 열리는 중식당으로 갔다. 우리 셋과 LA에서 온 해외 동포 남학생을 포함해 아홉 명이다. 최루탄 연기를 마시며 살았던 1970년대 학번들의 옛날이야기로 우리 안의 70년대 감성이 되살아난다. 50년 전의 나와 우리를 만나는 마법의 시간!
유난히 출결석 관리가 엄했던 대학, 우리 과 교수님 중에는 가톨릭 사제들이 여럿이었다. 한 친구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군대 제대 후 복학을 해야 했지만, 수중엔 돈이 없었다. 등록금이 없는 채로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던 그는 B신부님을 딱 마주쳤다. 어색한 인사를 드리고 우물쭈물 도망갈 기회를 찾는 그에게 신부님이 묻더란다.
“복학을 해야지?” “아, 네네. 근데 뭐 아직은...”
신부님이 다시 물었다. “돈이 없나?” “아닙니다.”
말없이 제자를 바라보던 신부님이 말했다. “지금 교무과로 가서 T신부님을 만나봐. 내가 전화를 해놓을 테니까.”
멍해진 그는 신부님의 말씀대로 교무과로 갔다. T신부님이 물었다. “등록금이 얼마나 부족하지?” 당시 등록금은 10만 원 정도. 그에게 있는 돈은 1만원이었단다. T신부님은 잠자코 금고에서 9만원을 꺼내 주며 말했다. “지금 은행에 가서 등록금을 납부하게.”
그렇게 그는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자 또 다른 친구도 B신부님의 도움으로 등록금을 해결했던 이야기를 했다. 전혀 몰랐던 사실! 그 당시 제3세계권의 나라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에서 가난한 제자들을 향한 신부 교수님들의 조용한 사랑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우리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B신부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맥주와 고량주의 도움이었을까? 친구들은 젊은 날의 좌절과 상처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난이기도 했고 서툰 연애의 실패담이나 앞날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러자 그 시절 죽을 만큼 감추고 싶었던 상처와 열등감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고 우리는 기분 좋게 웃어댔다.
담담하게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건 아마도 우리가 젊은 날의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증거. 친구들은 어느덧 각자 서있는 자리에서 삶의 이치를 깨달은 것 같다. 그것은 아주 보통의 깨달음이겠으나 우리들의 노년을 명랑하게 지탱해줄 핵심 자산이 아닐까.
아프고 빛났던 젊은 날을 기억하고 있기에 우리들은 서로에게 거울이다. 함께 나이 들어 갈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본다. 오래된 인연이 고맙고 사랑스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