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에디터의 앨범 리뷰
역경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말은 르세라핌이 데뷔때부터 지금까지 밀고 오는 주된 컨셉이었다. 말이 씨가 되듯, 2024년은 르세라핌에게 역경의 한해였다. Easy에서 과도한 레퍼런스 논란은 많은 커뮤니티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의 코첼라에서의 라이브 논란은 수많은 밈과 조롱을 남겼고, 레퍼런스 논란을 의식한 듯 이후에 내 놓은 Crazy는 아쉬운 앨범 성과를 남겼다. 이후 절차부심해서 이번에 미니 5집 HOT을 내놓았다.
‘Born Fire’는 이전 앨범들처럼 3개 국어 나레이션 형식의 인트로로 시작한다. 가사 자체는 전작 Crazy의 ‘Chasing Lightning’에 비해 다소 유치해졌지만,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구성하고 팀의 아이덴티티를 살리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도입 방식은 기대감과 함께 피로감을 유발한다. 당당한 여성상과 특유의 비트 구성이 재등장할 것이라는 예고로 작용하는 동시에, 익숙해진 전개는 아이덴티티라는 이름 아래 러닝타임을 채우기 위한 얄팍한 장치처럼 느껴질 위험도 안고 있다.
이후 등장하는 ‘HOT’은 인트로에서 쌓은 기대를 무너뜨린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랑에 대한 서사는 그동안 르세라핌이 보여줬던 이미지와 괴리감이 있어, 기존의 당당한 르세라핌을 기대했던 입장에서는 낯설게 다가온다. 더욱이, 이전 타이틀곡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독특한 비트 대신 익숙한 디스코 사운드를 선택한 점도 아쉽다.
이는 전작 Crazy의 매니악한 하우스 EDM 사운드와 보컬 실력 논란으로 인해 소속사가 대중적인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보컬이 강조되는 멜로디 중심의 구성이 실력 논란에 대한 정면 돌파로 해석되는 만큼, 곡 전반에서 활약했던 카즈하의 저음이 부각되지 않는 점은 또 다른 아쉬움이다.
르세라핌 특유의 매력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수록곡에서 다시금 살아난다. ‘Come Over’는 인트로부터 리듬을 타게 만드는 빠른 비트와 신디사이저 사운드로 청자의 귀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특히 앨범에 참여한 Jungle의 곡에서 자주 느껴지는 몽환적인 사운드가 곡 전반에 깔려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다만 보컬 스타일마저 Jungle을 따라가려는 듯한 인상을 주는 부분은 다소 아쉽지만, K-POP에서 좀처럼 접하기 힘든 사운드라는 점에서 충분히 용인된다.
ASH 또한 K-POP에서 보기 드문 다크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지닌 곡이다. 도입부에서 들려오는 허윤진의 호소력 짙은 보컬은 강한 인상을 남기며 곡의 감정을 단단히 끌고 간다. 곡이 반복되는 인상을 줄 무렵 등장하는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는 적절한 변주로 작용해 지루함을 상쇄시킨다. 이 곡은 인트로에서 제시된 서사를 가장 자연스럽게 이어받은 트랙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 트랙은 저지 클럽의 비트와 하우스의 결합을 예고했던 것에 비해, 실제 곡 전개는 전반적으로 평이하게 흘러간다. 보컬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으며, 오히려 중독성을 의도한 듯 삽입된 "ba-dum"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이 "ba-dum"을 제외하면 전체 구성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고, 가사 역시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아쉬움을 남긴다.
전반적으로 고려했을 때, 수록곡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를 보여주었지만, 타이틀곡에서의 급격한 방향 전환은 기존의 르세라핌 특유의 색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ASH’와 ‘Come Over’가 선사하는 즐거움을 함께 고려하더라도, 이번 르세라핌의 HOT에는 10점 만점에 5.6점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