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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상품 Jul 06. 2019

낯선 사람과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눈다는 게

누군가 나에게 어느 여행이 가장 좋았냐고 물어보면 그 순간을 떠올린다


#4 담양

달빛에 젖었던




누군가 나에게 어느 여행이 가장 좋았냐고 물어보면 그 순간을 떠올린다.




2018년 7월, 나는 첫여름 휴가를 담양에서 보냈다.


여행지를 담양으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숙소 때문이었다. 그곳은 150년 된 고택이었는데, 화장실도 집 밖에 있고 에어컨도 없는, 불편하지만 옛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혼자 여름휴가를 보내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을 때,  

‘여자 혼자 겁도 없다.’ 혹은 ‘뭐 할 게 있다고 그 촌구석으로 혼자 여행을 가냐?’ 하며 모두 나를 말렸다.


당시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고 직장을 갖게 된지도 반년밖에 되지 않았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을 신경 쓰게 되면서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고 무섭고 불편하더라도 오롯이 혼자인 휴가를 보내고 싶었다.




집에서 나와 숙소까지 가는데 대략 6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기차 타고 광주까지 3시간, 광주에서 담양까지 1시간 30분, 그리고 담양에서 숙소까지 1시간 30분.


사실 담양터미널에서 숙소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버스가 하루에 4대밖에 없는터라 1시간 동안 버스를 기다리고 30분 정도를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따라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를 찾아가던 중에 공포감이 불쑥 밀려오기도 했다. 영화 ‘실종’이 생각나면서 지금이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덜컹거리는 버스 창문 밖으로 본 정돈되지 않은 시골길과 가로등이 들어설 곳 없이 빽빽이 채워진 나무들이 공포감보다 큰 안심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묵었던 담양의 숙소. 고택이 주는 편안함은 호텔의 그것과는 꽤나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잡초 사이에서 골프를 치던 주인 할아버지가 반겨주셨다. 할아버지는 아가씨 혼자 먼길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다행히 오늘 숙박객이 한 명 더 있다고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골프채를 잡초들 사이에 툭 던져버리고는 나에게 방을 안내해 주셨다. 밥은 먹었냐며 김치와 흰쌀밥을 권하셨지만 사양을 하고 방에 누웠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여름 열기로 뜨뜻이 데워진 장판이 온몸을 땀으로 적셨다. 손풍기라도 가져올걸 후회를 하던 참에 살랑 불러오는 바람이 금방 땀을 식혀줬다. 윙 하고 울리는 천장 전등을 멍하니 바라보다 마루 구석에 있던 책을 꺼내와 읽었다. 한 손으론 모기를 쫓으며 책을 보고 있는데 누가 문 밖으로 ‘저기요’하며 나를 불렀다. 아까 할아버지가 말한 숙박객이었다. 그는 유명하대서 사 왔다며 나에게 도넛을 건네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도 나처럼 휴가를 맞아 타지에서 온 여행객이었다. 그는 책 읽는 거 방해한 거 아니냐며 멋쩍은 듯 웃었다. 나는 책을 덮고 저도 심심하던 참이었다며 그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와의 대화에서 그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 나이, 직업, 고향, 가족관계, 광주에 친한 형이 있고 그 형을 볼 겸 담양으로 혼자 여행을 왔다는 것 그리고 내년엔 직장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유학을 갈 예정이라는 것.


그 날 처음 본 낯선 남자였지만 꽤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대화의 대부분은 그가 말하고 난 들었지만 내가 낯선 사람의 얘기에서 흥미를 느낀다는 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간다는 게 신기했다. 당시에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버거웠고 한동안 친구들도 안 만나고 4년을 사귀던 남자 친구와도 정리를 했었기 때문에 그와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그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그가 대화를 멈추더니 하늘을 가리켰다. 보름달이었다.   



평상시에도 항상 봐 왔던 달이건만 그 날은 특별했다.


은은히 내리는 달빛이 따뜻했고, '달이 아름답네요.'하며 운을 띄는 그의 목소리가 근사했고, 촉촉이 젖은 흙내음이 향긋했고, 귓가를 울리던 풀벌레 소리가 정겨웠다.


그 날은 온전히 그 시간으로만 채워졌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작년 여름 내내 그 순간을 기억하면서 지냈었다.


나는 아직도 달빛과 촉촉한 흙내음과 풀벌레 소리로 가득 차 있었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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