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L.
남미 출신의 그는 중국 북경대 1호 외국인 유학생이었다고 한다.
중국통인 그는, 오랜 시간 대(對) 중국 무역에 몸을 담은 잔뼈 굵은 사업가였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참 했다.
한 번의 이혼을 거쳐,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해 노르웨이에 왔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하필 그가 왔던 시기의 노르웨이는,
류사오보에게 준 노벨 평화상이 단초가 되어 중국과 노르웨이의 외교 관계가 악화일로에 치달을 때였다고 한다.
내가 2015년 겨울에 왔을 때도, 노르웨이와 중국은 활발한 교역이나, 교류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으니, 꽤 오랜 시간 이 류사오보의 문제는 큰 외교 걸림돌이었다.
L은 이런 이유로 오랜 시간 동안 중국과의 사업을 노르웨이가 기반이 아닌, 자신의 본국 혹은 홍콩의 회사를 베이스로 굴려오고 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노르웨이와 중국을 연결할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했고, 나를 만났던 그 시점 즈음해서 노르웨이를 기반으로 다시 사업을 할 궁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야말로 적기에 그를 만났던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그는 나에게 많은 걸 질문했다.
나는 혹시 몰라 나의 CV를 인쇄해 갔지만, 그런 건 그에게 크게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어떤 일을 했는지, 여기서의 생활은 어떠한지, 취미는 있는지,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신변 잡기부터 요즘 내 심리 상태는 어떠한지 까지 물어왔다.
그렇게 나는 L을 세 번 정도 더 만나 커피를 마셨다.
만날 때마다, L은 항상 새로운 주제로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주도해갔고, 나는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진솔하게 답해갔다.
때로 그는
중국어로 오늘은 대화를 해볼까?
라며 중국어로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했고,
자신의 와이프를 대동시켜 나의 노르웨이어를 확인해보기도 했다.
때로는 내가 생각하는 노르웨이와 중국의 사업 가능성에 대해 물었고, 나는 다행히 그간 다녀본 콘퍼런스와 세미나들을 통해 쌓은 배경지식으로 내 나름의 주장을 펴 나가기도 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중국과 브리지 연결을 하는 프로젝트가 우후죽순으로 시작되고 있었고, 나는 그와 관련된 생각을 말했다.)
세 번의 만남이 지난 후, L은 나에게 같이 일하고 싶다고 메일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세 번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 나름의 인터뷰였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취업이 되었다.
물론 L을 만나기 전까지도 나는 꾸준히 이력서를 어딘가에 제출하고, 리쿠르팅 회사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결국 내가 취업을 하게 된 것은, 내가 생각한 계획을 실행하다가 얻게 된 것이다.
그렇게 팀에 합류했고,
나는 돌고 돌아 다시 중국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노르웨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