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시간, 통과의례가 아닌 그 자체의 축복

by 청블리쌤

광야는 성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히브리 원어로 볼 때 광야(Midbar)는 지성소(Dvir)에서처럼 Dvar(말씀, 말하다)라는 어근을 공유한다.

지성소는 하나님 말씀의 장소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신성한 공간을 나타내고,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소'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성경의 중요 인물들은 광야를 거쳤다. 광야는 공간 이상의 상징적 의미로 우리 삶에도 적용된다.

광야는 외부의 자극이나 도움이 차단된 최소한의 생존 환경이기도 하고, 어려움과 고난의 과정이기도 하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의 끝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큰 성장의 희망이며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눈에 보이는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다가 실패와 좌절 이후 광야를 마주한다. 그리고 삶의 전환점 같은 변화가 시작된다.


자발적인 선택이나 결단 없이 교회를 일상처럼 다니던 모태신앙인들은 영적 파산을 겪어야 진정한 믿음의 삶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래서 광야는 겪을 당시에는 피하고 싶은 고난이었겠으나, 이후 은혜와 축복의 자리였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전교 1등의 영예와 서울대 진학 후 이어지는 성공이 내게는 삶의 목표였고 내 공부의 이유였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내 힘과 내 노력만으로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모태신앙이었던 내게 하나님은 늘 내 곁에 계신 분이었지만 거의 관념상의 존재였다. 나의 계획의 조력자로만 생각했고 나의 기도도 늘 나의 계획을 이뤄달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난 노력한 만큼의 성취를 삶에서 누리며 자신감으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서울대 낙방 후 나의 생각은 근본부터 뒤집혔다. 나를 지탱해 주었던 성적과 서울대 진학의 가능성으로 내 가치를 증명해 내지 못했다. 그 실패감과 무력감 속에서 강제로 겸손해진 상태로 집에서 시작한 나 홀로 재수는 내게 광야의 시간이었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원망과 좌절과 무력감 속에서 그렇게 영적 파산까지 겪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결정적 계기를 광야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진정한 복음을 알게 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시간이었다.

나의 대학 실패는, 결국 재수해서도 서울대 진학에 실패했음에도 오히려 내게는 더 큰 축복과 은혜의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은 네이버 길찾기나 내비게이션 안내로 최단 거리를 잡았다면 300km 정도로, 하루에 20-30km를 이동한다고 했을 때 10-15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40년이나 걸렸다.

gdGSh_iJuLqyKZ6VUdSLufTlMTlqwzWupUQJDRF7Nz8P1f-HYau8my7n5LRKLAMNAX4HJ3kPdUCvk6DtF59UBIfq7hcA3gscBgclAYbHmkUe44pMeJZ2SN9SAZ_psnjno1ytQxI 출처 : http://missionworld.net/bbs/board.php?bo_table=holylandegypt&wr_id=6

그들이 통과한 것은 광야였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았다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으로 준비되지 못했을 것이고, 최단 거리로 갔을 때 준비 없이 마주했을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멸절되거나 다시 애굽으로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을 것이다. 홍해를 건넜기 때문에 뒤쫓아오는 애굽 군사들의 칼을 피할 수 있었다.

광야를 통과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였을 때가 더 좋았을 거라고 불평하며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이런 불신과 반역에서 돌이켜 광야에서 훈련을 받으며 충분히 준비되어 다음 세대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렇다고 광야는 의무적으로 통과하고 버텨내서 이후의 성취를 해내는 수단적인 의미가 아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시편 84:10) 인정한다면 광야는 더 큰 축복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울왕에게 쫓기면 10여 년을 광야에 머물렀고, 야곱이 형들에 의해 팔린 후 총리가 되기까지의 광야 같은 기간도 감옥에 갇힌 기간 포함해서 10년이 넘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의 설교의 이런 대목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다윗이 왕이 되는 성취를 이루기 전에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게 된 것이 우선이고 본질이었다. 왕이 된 것은 그 뒤에 부수적으로 따라온 결과에 불과했다. 요셉도 총리가 되기 위해 고난을 버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것 자체가 중요했고, 총리라는 직책은 그 뒤에 주어진 것이다."


믿는 자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는 안 되고, 돈을 많이 벌어서도 안 된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성공이나 그런 목표 자체가 우선순위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만남과 믿음의 성장이 본질이고 우선인 것이다.

보통은 그 과정 중에 광야 같은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 광야는 만남과 변화와 성장을 의미한다.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나 자신의 직책을 생각했다. 교직 경력이 27년을 넘어섰는데 난 여전히 평교사로 남아 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열심히 했다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을까? 내겐 그런 능력이 없었지만, 그런 능력을 구하지도 않았다. 승진의 기회를 노리지도 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동기와 가까운 선배들이 교장, 교감선생님을 하고 있다.

내가 그분들처럼 노력을 덜해서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나 후회는 없다. 그분들의 성취를 존중하지만, 난 내 삶의 성공과 명예와 부에 대한 가치가 바뀌었기 때문에 시도하지 않은 것은 나의 게으름이나 귀찮음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높은 직책으로 올라가는 것이 나의 성공을 규정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교장선생님께서 나와 사적인 대화를 할 때, 아이들을 너무 사랑했고,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장학사의 길을 가게 되었을 때 차를 멈추고 눈물로 다시 주어지지 않을 교실에서의 수업과 학생들 만남에 대한 애도를 하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장학사, 장학관, 교장선생님으로서 그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크고 중요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계시지만, 그 눈물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아서, 그 선배 선생님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진심이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는, 굳이 그 앞에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퇴직을 하면 그 자리를 무조건 떠나야 하지만, 난 학생들을 만날 기회에서 스스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직접 아이들을 만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늘 설레고 전율하고 행복해하고 있으니까. 그 행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혹 승진을 하거나 더 높은 자리에 서서 발휘할 수 있었을 능력이 내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아이들에게 다 쏟아붓기를 원했다. 아이들과의 만남은 한 명, 한 명이 우주와 같은 귀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 기적 같은 기회를 난 포기할 수 없었다.


난 지금과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학생들 만남에 진심이고 행복교육의 가능성으로 설레며 티칭과 코칭을 하고 있다.

교실을 떠나는 승진을 원했다면 애초에 교직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에도 승진 등의 진로에는 무관심했던 이유다.

어쩌다 보니 감사하게도 내게 교사, 학부모 강의 기회가 너무도 많이 주어졌다. 이 또한 내게는 학생들과의 간접적인 만남이다. 부모님을 통해 아이를 만난 것 같은 영향력에 의미를 부여하니까. 내가 만난 교사들이 만나게 될 학생들에게 닿을 수 있는 영향력에 전율하게 되니까.


과정의 모든 순간에 의미 부여를 하니, 그 결론이나 도달점의 높낮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학생들이 나를 가까이해주지 않을까 봐 걱정일 뿐, 난 여전히 내 자리에서 학생들을 만나서 교육적 가치를 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한결같이 행복해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도 그들의 삶의 여정에 대해 늘 이렇게 강조한다.

행복할 만큼의 성장 과정, 어쩌다 보니 성취하는 결과


그러니까 본질이 전부이며 핵심이다. 결과는 어쩌다 보니 따라오는 것이다. 성공과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씀을 들으면서 나의 그런 교육적 가치와 관점을 겹쳐서 묵상했다.

각자의 출발점이 다르고 속도가 다른 것, 그리고 도달점도 다른 것... 그것으로 행복과 가치의 크기를 비교할 이유는 없다. 도달점만으로 성공과 실패를 규정할 수도 없다.

지금 가는 길이 광야 같더라도,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보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미래의 성공을 위해 희생해야 할 수단적 통과의례로 생각되더라도, 우리가 이뤄야 할 가치는 지금 이 순간의 만남과 변화와 성장이며 과정 중의 행복이어야 한다. 그게 본질인 것이니까.


나의 삶을 통과하는 교육을 이루는 것이 내 꿈이다. 사는 대로 가르치고 가르치는 대로 사는 마법 같은 삶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다.

그런 삶을 이렇게 글쓰기로도 구현한다. 사는 대로 쓰고, 쓰는 대로 살게 되는 마법...


광야의 시간은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다. 때로는 자발적으로 광야로 나아가려 한다.

오롯이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과 장소...

만남과 변화와 성장.. 살아 있다면 계속되어야 하는 삶의 목표와 의미다.



https://youtu.be/zIdppmRuluk?si=kb9oIQoU3suTwzcx


광야를 지나며 - 히즈윌


1 절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후렴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브릿지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2 절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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