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 적도 있었고, 지금도 교사지만 내게도 초보 교사인 시절이 있었다. 학생이면서 교사였던 두려움과 설렘이 가득했던 일생의 단 한 번의 무대인 교생실습 시절도 있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깝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제 교사 같은 느낌으로 현장에 섰던 기억은 교사로서 학생들을 만났다는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다.
실제적인 교사의 시작은 교생실습이었다.
가장 힘들고 부담된다고 알려진 경대사대부고 교생을 나갔다.
난 도전을 받아들였다. 첫인상으로 어필하는 걸 실패하고, 학생들이 내게 보여주지 않은 호감을 얻으려고 내 성격답지 않게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치열한 노력도 했다.
수업 시수를 짤 때 미드 의학드라마에서 서로 수술을 들어가려고 경쟁하듯 한 시간이라도 더 수업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기도 했다.
지금 손위 처남과 함께 나간 덕분에, 처남이 여학생반 수업을 너무 부담스러워한 덕분에 난 20시간의 수업 중 절반의 시간에 여학생반 수업을 하면서 더 큰 감성을 나누며 교감할 수 있었다.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이나 교생들에게만 악명이 높았던 최고의 지도교사를 만난 것도 내게는 큰 도전이었지만 덕분에 급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축복이기도 했다.
그때 수업방식과 학생들에게 진심을 다하는 법을 배운 덕분에 교생 수료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현직교사로 고등학생들 앞에서 설 때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교생의 4주 기간은 내 교직생활의 압축된 예고편이었다.
점심시간마다 교실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고 대화를 하고 상담을 했다.
첫수업을 앞두고 발목을 다쳐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수업내용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준비하던 그 설렘의 순간도 잊을 수 없고, 첫 수업 때 보여주었던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과 교감의 순간도 잊을 수 없다. 아이들은 웃음이 헤펐고 너그러웠다. 그 웃음으로 나의 긴장감을 해제시켜주었고 나의 최상의 것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학생들 복이 있던 건 교생 때부터였던 거다.
담임 반은 여학생 반이었다. 마침 담임 반에서 대표 연구수업을 하기로 했다. 내성적이고 쇼맨십이 부족했지만 동기들은 나를 믿고 밀어 주며 연구수업 마치는 순간까지 응원해 주었다. 수업 직전 떨림을 주체하지 못할 때도 내 옆에서 음료까지 챙겨주며 격려해 주었던 진심 어린 응원도 잊지 못한다.
내 수업이 실제 학생들에게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그때 얻었다.
연구수업이 아니라도 나는 내게 배당된 조 학생 외에도 전체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며 다가갔다. 교사가 되어 전교생 이름을 외워야 할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연구수업 때 이름을 불러주고 교감하면서 수업을 했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내가 칭찬 듣는 수업을 하기 위해 정말 진심으로 반응을 보이며 혼신의 연기까지 해냈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 혹시 자신들이 더 잘 하지 못해서 내가 협의회 할 때 교수님들께 야단맞는 것 아닌지까지 걱정해 주었다.
협의회 때 교수님들께 극찬을 받고 그 소식을 전할 때 아이들은 자기 일인 것처럼 그렇게 뛸 듯이 기뻐해 주었다. 그 진심이 닿는 응원의 마음과 감격의 순간도 잊을 수 없다.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던 그 시절.. 학생들과의 인연의 끈은 우편으로 보내는 손편지로만 가능했다.
지금 교생 지도할 때 학생들과 연락처를 사적으로 주고받아 학교 밖에서 연락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 당시에도 교생 기간 이후에 교생쌤과의 사적인 연락이 권장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들은 교생 마지막 날 오열하면서, 그들 못지않게 오열하는 나를 떠나보내고도 아쉬움과 그리움을 담아 내게 편지를 썼다.
대학교 4학년으로 임용고시, 대학원, 교육대학원 세 가지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난 시간을 쪼개서 일일이 아이들에게 답장을 다 해주었다. 안부를 묻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고민에 대한 상담도 해주었고, 응원과 격려의 마음도 담아주었다.
너무 행복한 시간들이어서 교생실습 학점을 날리고 다시 한번 더 교생을 나오고 싶은 상상도 했지만, 교생실습 4주 후에도 나의 교생실습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수업 시간 외에 학생들과 상담을 하며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삶으로 체험했다. 그때 받은 편지가 150통이 넘었다. 나도 동일하게 편지 답장을 했다.
나는 아이들의 대입을, 아이들은 나의 임용시험을 응원했다.
공부하다가도 문득 아이들이 그리워지면 연습장에 반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써가면서 그리움을 담아냈다. 그들은 다시 내가 교사로서 만날 대상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후에 만날 미래의 학생들을 미리 만나는 듯한 설렘과 그리움의 실체였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아이들의 응원에 부응이라도 하듯 난 더 열심히 공부했다.
바로 임용고시 합격을 하고 시내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고 나서...
지도교사님께 인사드리러 가서 꿈에도 그리던 아이들을 다시 찾았다. 교실에 들어가서 아이들에게 인사를 할 때 꿈을 이룬 나의 모습으로 힘을 얻듯, 진정한 축하의 마음을 마음껏 보여주듯 학생들은 뜨거운 박수로 나의 인사에 답례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교생실습 기간에 교사로서 어떻게 학생들을 만나고 수업을 해야 할지 구체적인 모형을 확립했고, 그때 만난 아이들은 임용고시 준비를 위한 열정적인 공부의 이유가 되어주었다.
지금도 여전히 학생들 덕분에 존재하고 힘을 얻지만, 교생 때부터 그런 공존이 시작되었던 거다.
그중 어떤 학생들과는 10년 후에 다시 만나기도 했다. 온라인 문화의 발달로 인한 것이었다.
그때 학생 한 명이 그 만남을 기념하며 "10년 후에도 우리는"... 이라는 온라인 카페를 개설하기도 했다. 물론 일상의 만남으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교생과 학생의 신분으로 만난 지, 그 후로 30년 후 그때의 학생을 다시 만났다. 그 제자는 내 블로그로 댓글을 달아 소식을 전했고, 중3이 되는 큰딸의 컨설팅을 신청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를 처음 만났던 그 나이 또래의 딸의 엄마가 된 제자를 만나다니, 믿기지 않았다. 기억 속의 얼굴과 목소리가 신기할 정도로 반가웠다.
짧은 시간의 지난 회포를 다 풀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각자 기억에 있는 파편을 나눴다. 맥락 없는 파편이었고, 각자의 파편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뭔가 연결고리가 있는 듯했다.
나이 차이가 7살 밖에 나지 않는 거의 동시대 서로의 리즈시절을 기억하는 증인으로...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진심을 다하며 살고 있는 한결같음을 확인했다.
그 당시 응원의 마음을 전하듯... 마치 시간을 거슬러 그때의 제자를 만나듯 딸의 학습 방향에 대해 컨설팅을 해주고 헤어졌다.
교사로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교생 시절의 모든 소중한 만남과 기억을 대표하는 듯한 제자와의 극적인 재회는 오랜 세월의 흐름으로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만남과 교육의 가치를 삶으로 체험하게 된 축복 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