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distance)의 역설

by 청블리쌤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코로나 백신은 화학백신보다 생태백신, 행동백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물리적 거리 유지나 마스크 착용 등의 행동으로 할 수 있는 백신은 즉각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생태백신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야생동물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코로나19의 시작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야생의 것을 건드려서 즉 거리유지를 하지 않아서 생긴 재앙일 수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도 언급된 대로 인간끼리도 어떻게든 서로 네트워크처럼 얽혀있으며 모두가 자신만의 페스트를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그 잠재된 각자의 말과 행동, 심지어 존재 자체도 누군가에게는 감염과 같은 영향을 줍니다. 그 거리를 존중하지 않아서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안기기도 했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인간관계의 거리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의 거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잊기 쉬운 그 거리를 더 존중해 줘야 건강한 관계가 유지됩니다.


특히 교사들은 늘 엄청난 인간관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으며 매년 그 관계도 재편됩니다. 정말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자리인 것이지요.

학교나 집에서 제가 겪은 바로 사춘기는 어느 정도의 거리 이상을 유지해 달라는 아이들의 몸부림이자 절규입니다. 그리고 사춘기가 빨라진 현대에는 어느 연령대에서도 그런 아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의도적인 거리가 필요합니다. 교사든 부모든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그 거리가 방임이나 무관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일 수 있는 그 침묵의 시간에 언제든 다가오면 반겨줄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먼저 다가오는 빈도나 정도가 더 늘어나고 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당 같은 효과입니다.

서두르거나 강요하면 꼰대가 될 수 있는 상황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는 일부러 거리감을 느끼도록 나쁜 사람인 것처럼 연기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 밀당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두렵고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오며 그들의 절실한 필요를 그들 스스로 채워갑니다.


그건 정서적인 필요만이 아니라 학업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언제든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는 영어교사입니다. 저희 딸들은 아빠이긴해도 소위 현직교사의 과외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어 주변에서는 부러워하는데 정작 이 아이들은 하나도 실감하지 않습니다. 보다 못한 아내가 개입하려 했지만 역효과만 났습니다.

저의 작전은 이거 하나였습니다. 거리를 존중하고(그들의 선택을 아빠 찬스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시기라는 안타까움이 드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존중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늘 불러주기만을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딸들이 시험 성적이 망하거나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위기감을 느낄 때에야 기회주의자처럼 아빠를 찾습니다. 평소 아빠의 현실적인 조언도 잘 안 먹혔습니다. 자기들이 직접 실패해야 절실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억지로 불러다가 공부를 시킨 적도 있었지만 본인들이 먼저 다가오는 학습효과에 절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학습도 거리 존중에서 나옵니다. 자기주도성을 회복하여 거리를 좁히는 것은 교사의 역할이 아니라 학생들의 책임이자 자기 권리여야 합니다. 주도성을 회복한 학습만 자발적으로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표준화된 기준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성과를 똑같은 시기에 강요하는 교육시스템에서 오히려 실패의 긍정적인 성장 경험을 격려해야 자기 주도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과정을 생략하며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어내야 한다는 과도한 성취 의지를 강요한다면 학생의 성장보다는 교사의 과도한 개입이 불가피해지며 이는 학생들이 원하는 정도의 거리를 존중해 주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실패를 막아주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준다는 명분으로 학생들의 배움과 성장의 즐거움을 박탈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위험 신호는 늘 있습니다. 학생들의 무력감과 반항심 등으로 표현되는 그 과정을 어른의 각본대로 이끌어 가다는 완전히 말 그대로 탈선할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그건 적극적인 살아남기 위한 방어기제입니다. 소심한 학생들은 한없이 내면이 무너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의 거리 존중은 필연입니다. 거리는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더 다가가고 싶어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멈춰야 합니다.

상대가 더 다가오게 하려면 오히려 거리를 유지하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일정 시간을 지나고 나면 아무리 기다려도 다가오지 않을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심리적 독립뿐 아니라 완전한 독립을 이루는 시기입니다. 부모나 교사는 계속 역할을 더 해줄 수 있고 아이와 사소한 즐거움까지 함께 하고 싶어 하지만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그 거리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대학생이 되어 드디어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된 큰딸에 대해서 생기는 애틋함은 부모의 필요에 의한 허전함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독립을 누리고 즐기며 그렇게 재미있게 살아갑니다.


결국 교사와 부모는 점차 그들이 필요하지 않는 그 순간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그들이 숙명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이가 커갈수록 어른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가 거리를 좁힙니다.

그 이후의 관계에서도 늘 달라지는 거리를 존중하며 달라지는 역할마저 늘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대학생인 큰 딸은 집에서의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습니다. 남들은 그럽니다. 대학생이 되어 독립을 이루는 딸에 대해 올 때마다 눈물로 맞거나 보내지 않게 될 것이며 점차 담담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제가 두려워하는 건 오히려 담담해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집에서의 빈자리가 크지 않게 되고, 현실에서의 아빠의 역할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것이 당연해지며, 딸이 집에 손님처럼 와 있을 때보다 독립한 그 장소에 가 있을 때가 더 자연스러워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제 마음은 딸의 독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곁에서도 저의 모든 교육과 조언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고 저도 그걸 강요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얻었던 딸이 그곳에서 긍정적인 삶의 변화와 성장을 이룰 것을 응원하고 기대하며 지켜보는 것이 제 역할이라는 인정이 지금 머리에서 가슴으로 힘겹게 옮겨지는 중입니다. 그러는 제게 얼마 전 책을 읽다가 발견한 유진 피터슨의 아래 묵상글이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내 삶에 변화를 가져다준 이들은 누구인가? 나를 변화시키려 애쓰지 않았던 이들이다. - 유진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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