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책을 집어 삼킬 것인가? - 김성우, 엄기호

by 청블리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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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멀티미디어 시대에 살아가는 역량을 키우는 지침서와 같은 책입니다. 교사들은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변화와 학생들의 문해능력 정도를 바로 피부로 느낍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학생들의 문해력과 말에 대한 이해력이 자꾸 떨어집니다.


이 책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 최적화되지 못한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교사들의 문제점과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험대비 이상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문해력, 인간관계에서 결정적인 말귀를 알아듣는 능력, 더불어 살아가며 상대방의 입장까지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넘어 역지사지의 사유 능력 등 세대를 초월해서 꼭 붙들어야 할 중요한 본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물론 자기발전을 위해서도 읽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라도 곱씹어 읽어보면 도움이 될 내용들도 많습니다. 모든 내용에 100%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리터러시를 키우는 살아 있는 배움과 성장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책 내용 중에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을 간략하게 발췌하였습니다. 보통은 중심내용을 발췌하면 다른 내용들은 다소 쉽고 더 구체적인 내용이 이어지지만 이 책은 구체적인 내용에서도 버리고 선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속 깊은 내용이 꽉 차 있습니다.




리터러시란?

Literacy리터러시(문해력) : 글을 배워 알고 더 나아가 이를 활용하여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고 이를 분석, 평가, 소통하여 개인과 사회의 문제나 과제를 해결하는 능력



활자혁명 이후 말의 세계에서 글의 세계로 전환 – 세계를 텍스트로 여기기 시작함(근대주의)

학력고사는 고정된 의미의 텍스트를 무비판적으로 암기하고 받아들이는 문해력(지문 내 출제)

수능은 복합적 의미를 따지는 역량과 해석의 문해력(지문 외 출제)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 : 정보나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게 아니라 ‘보고 찍는’ 것으로 전환


그러나 시험은(수능까지도) 여전히 텍스트

검색엔진보다 유튜브로 검색하는 세대인 10대, 20대는 불행한 세대. 삶에서 늘 접하는 미디어가 동영상과 이미지, 소셜미디어인데, 이것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어른들에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젊은 세대가 삶 속에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을 평가할 만한 잣대가 어른들에게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함.



사회경제적 토대가 약해서 경제적으로 힘들고, 교육받을 기회 또한 상대적으로 적었던 60, 70대 노년세대는 문해력이 뛰어난 세대가 아닌데 동영상이나 카톡 같은 소통 수단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리터러시를 접하게 됨.

흔히 말하는 비판적 리터러시를 갖출 만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카카오톡이나 유튜브가 이분들의 세계가 되어 버림. 사회적, 교육적 공백이 체계적으로 리터러시를 키워주거나 비판적으로 신문이나 잡지, 책을 소화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아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미디어의 거짓 정보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임. 소통과 표현에 대한 욕망이 둑 안에 갇혀 있다가 새로운 채널로 출구를 찾은 것임. 그런데 이 상황이 40, 50대에게는 되게 한심해 보임.



인터넷 논쟁에서 답답한 건, 그 최종적 판단자가 원 글의 저자가 아닌 대부분 자기라는 것. 자신이 원하는 독해만 맞는 독해라는 고집.

리터러시 행위를 정해진 의미의 전달로 보는 반대편에 수용자를 중심에 놓는 관점이 있는데, 흔한 오해는 수용자, 즉 독자가 천 명이 있으면 똑같은 텍스트의 의미도 천 개라고 보는 것이고 이건 극단적인 포스트모던적 읽기관임.

리터러시를 ‘자신이 정한 상대주의’틀에서 쓰는 오류를 범함.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할 때 ‘꼰대’나 ‘적’이 되는 현상은?

가르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두 주체가 동일한 언어를 쓰지 않음이 전제가 됨. 생각의 지평 사이에, 또 언어 간에 도약이 있는 상황에서만 가르친다는 행위가 존재할 수 있음. 그래서 가르친다와 말하다는 다름.

그런데 자기생각과 조금만 다르면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배우려는 겸손함이 전혀 없는 오만함과 리터러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

앎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도약이 되어야 함. 차이가 있어야 함. 나와 똑같은 사람에게서 배울 수 없음.

진정한 문해력은 제대로 읽게 되는 것, 지금까지 읽던 방식이나 내용과는 다르게 읽어낼 수 있는 힘. 이런 도약은 유사차이가 아니라 진정한 차이를 끊임없이 발견하거나 만들어야 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대개 동의한다는 말은 자신도 알고 있다는 의미임. 배움과 도약은 아니며 그저 감정의 정도만 강화됨. 진정한 도약을 통해서만 배움(진정한 리터러시)



말과 글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키워주는 게 리터러시 교육의 목표지만 학생들은 ‘읽기는 따분하고, 텍스트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받아들여야 하고, 문제를 풀기 위한 읽기가 최고다’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받아들임.

비판적이면서 자유롭게 텍스트를 오갈 수 있어야 하는데 평가에 맞춰진 과정은 학생들에게서 그런 자유를 빼앗아감. EBS 수능 연계 영어지문은 그 자체의 해독력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시험에 출제되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암기하듯 고정하여 받아들이는 부작용이 있음. 그래서 학생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자신의 흥미를 반영하여 볼 수 있고 흥미의 꼬리를 물며 탐구할 수 있는 유튜브에 더 쉽게 빠질 수밖에 없음.

그러나 텍스트는 영상에 비해 어떤 생각이라도 다 언어화할 수 있다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음. 영상의 효과는 텍스트보다 더 강력하지만 영상이 커버할 수 없는 부분을 텍스트가 담당함.

검색과 인용 등 다양한 소스를 엮어 하나의 논리적 구조로 만들 때 단어의 연쇄라는 동일한 포맷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과 문자매체는 시각매체에 비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강력한 장점을 가짐.



시험을 위한 읽기에서 읽기를 돕는 시험으로 전환되어야 함. 시험을 초월한 읽기 능력은 심지어 계급형성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특권이 될 수 있음. 미디어시대 리터러시는 소수의 경쟁력이 될 것이므로.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에서 텍스트와 읽기가 공감능력을 키워준다는 주장. 공감능력보다 역지사지의 사유역량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폴 블룸의 <공감의 배신>)

극단적 구체화 형태인 영상보다 텍스트는 오히려 구체화되지 않음으로 인해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으며 역지사지 사유역량이 더 발휘될 수 있음.

수동적 참여가 가능한 영상보다 책을 읽을 때는 나의 참여와 관여가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함. 언어의 추상성으로 인해 무한대의 상상능력이 발휘될 수 있음.

그 추상성으로 인해 읽기의 진입장벽이 높아 초기의 길고 꾸준한 훈련이 필요함. 맥락에서 단어의 의미를 확장하는 능력도 키워가야함.

이를 개인의 역량으로 판단하기 전에 사회시스템, 교육환경, 자연스러운 활동 유도 등의 뒷받침되어야 함. 리터러시는 개인적 역량보다 사회적 역량이며 자칫 엘리트주의로 흘러가거나 양극화될 수 있음. 리터러시는 개인적 역량이지만 사회적 역량의 요소를 무시하면 신문은 안 읽고 매일 유튜브만 본다고 비판하는 혐오 등에서 벗어날 수 없음.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뭐하러 책을 읽냐는 질문에

단편적 지식이 아닌 여러 개의 정보를 종합하거나 전문적인 내용을 읽어야 하는 부분은 간단한 검색으로 해결 불가.

지식은 대개 어느 정도 소화를 해서 내면화해야만 바로바로 공유하고 적용할 수 있음

지식은 수집하여 쌓는 것이 아니라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함

내재화(internalization) - 30년 동안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고 해서 계산 능력이 키워지지 않으며 머릿속에서 직접 계산해봐야 내재화 됨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내가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가’에 머물지 말고 기존 지식을 엮는 것과 종합하여 발효시키는 내재화 과정을 키우도록 도와주는 게 교육임



말로 사람을 만나고 세계를 짓는 사람들에게 리터러시에 해다되는 것이 ‘말귀’임

말귀는 세계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함



멀티리터러시 시대

미디어 자체에 대한 이해 높이기

텍스트 이해, 영상과 이미지 이해, 말귀라고 불리는 구술에 대한 이해 등 모든 리터러시가 종합적으로 교육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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