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와 자유를 주지 못한 아빠의 변명

by 청블리쌤

큰딸이 오래간만에 집에 내려왔다.

얼마 전 할머니가 주신 용돈 3만 원으로 평소 좋아하지만 자주 갈 수 없었던 초밥을 먹으러 갔다고 한다. 회전 초밥집이었는데 정신없이 먹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1800원짜리 접시를 20개나 먹었다는 말을 했다.

정신을 차렸다는 건 예산의 범위를 훨씬 넘었다는 현실 인식이었다.

넉넉하게 생활비를 챙겨주지도 못하고 있어 안쓰러운데 딸은 더 바빠진 랩실 생활에도 어떻게든 알바를 구해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생활비 보조로 준 아빠의 체크카드를 거의 쓰지 않으려 해서 늘 짠하다.


수입의 범위 내에서 지출해야 한다는 원칙은 아내와 내가 몸소 과도하게까지 보여주었던 점이지만.. 그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딸과 함께 초밥 뷔페를 찾았다. 처음 계획했던 곳보다 훨씬 비싼 곳으로 즉흥적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알바와 랩실 생활이 바빠서 딸이 자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무리해서라도 큰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

딸은 먹는 내내 행복해했다.

난 그 이상으로 행복했다.


문득 어린 시절 규제와 통제로 딸은 힘겨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는 시간도 제한하고, 휴대폰도 해주지 않고, 용돈도 넉넉하게 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토피가 심해서 간식을 사주지도, 사 먹을 돈도 주지 않았다. 마트에 시장 보러 가면 딸은 아토피 다 나으면 과자 먹을 수 있냐고 애처롭게 물었던 슬픈 기억이 내겐 아픔으로 남아 있다.

딸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딸은 길을 가다가 100원짜리 동전을 주워서 문구점에 가서 불량식품 같은 걸 사 먹었다고 했다.


지금은 학부모 강연마다 넘어지는 힘, 좌절과 실패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딸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스스로 얻어낸 자유의 몸짓에 반응한 것이었을 뿐... 애초에 내가 가진 철학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하루 정해진 분량의 공부를 해야만 아이패드를 일정 시간 허락해 주었다. 어쩌다 딸이 아이패드를 몰래 가져다가 밤새도록 제한 없이 볼 때 완전 꿀잼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못하게 하니 더 재미있게 했을 거라는 위로를 하기에는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더 주지 못한 자책이 커졌다.


어린 시절 놀이공원에 자주 갔었다. 연간회원권으로 집에서 가까운 놀이공원을 산책하듯 다니면서 아내는... 놀이공원 앞에서 파는 헬륨 풍선을 바라보는 딸들에게 "저거는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했고, 단 한 번도 사주지 않았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풍족하게 채워주지 못해 커서도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딸에게 변명하듯 말하니, 딸은 엄마에게 늘 그 얘기를 들으면서 "아닌 것 같은데"라는 의심을 속으로 했다는 것이었다. 딸은 의외로 세뇌당하지 않은 멀쩡하게 의문을 품었던 거다.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 나와 아내가 표현할 기회와 자유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딸은 사춘기 초입에서 학교에서도 모범생 프레임을 벗어던졌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순응하면서 소통을 잘했지만, 결정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중학교 때 교회 중등부 밴드에서 베이스기타를 치게 되었다는 말에.. 평소 연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딸의 소질을 키워주고, 삶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고 싶어서.. 나도 기타를 치면서 누리는 살의 즐거움을 체험하고 있었으니까...

무리하게 베이스기타와 앰프 세트를 몇 년 치 생일선물이라고 안겨주었었다.


그 일이 아니었어도 딸은 스스로 발견한 재능으로 고집을 부렸겠지만...

그 일을 계기로 딸은 베이스기타에 몰입하며 고등학교 가서 베이스 기타 전공을 하고 싶다는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현실에 기반한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흔쾌히 허락할 수가 없었지만 딸의 절실함을 보고 성적이 떨어질 것을 확신하면서도 딸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딸은 예담학교라는 위탁학교에 주 2회 방과후형으로 한 학기 반을 다녔고, 스스로 진로로서 음악을 포기하고 대학 갈 공부에 집중해서 떨어진 내신성적으로 정시파이터에 몰렸지만, 논술로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가서도 밴드부와 디제이 활동을 했다.


예전에는 아빠의 개입에 순응했었지만 이후에는 고집을 꺾을 수 없는 순간이 왔고, 그 순간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를 응원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직감했다.


남들은 딸이 하고 싶은 것을 존중해 주고 응원해 주는 내가 아빠로서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런 아빠가 되도록 강요된 현실이었을 뿐이다. 딸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갔다. 풍족하지 못한 상황과 억압과 규제 속에서도.


억눌림에 대해 딸은 이런 얘기를 했다.

산책할 때 엄마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며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하면서 교회를 옮기려 한다는 말을 했다면서 막 웃었다.

보통 그런 비장한 선언 이후에 따라올 말은 "교회를 당분간 안 가겠다"는 말이어야 했다고...


그렇게 우리의 높고 빡빡한 기준을 엄격한 규제처럼 딸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다행히 딸들은 그 기간을 잘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다.


다 해주지 못한 미안함, 다 하도록 허용하지 않은 억누름과 억압.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발견했다

딸은 초등학교 때 아빠가 차도남이라는 걸 원망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수업 발표 시간에 자랑했고, 중학교 때 영어 50점을 맞고도 아빠가 영어쌤임을 자랑했고, 영어쌤 딸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딸에게는 차도남은 '차가운 도시남자'가 아닌, '차 없는 도시 남자'라는 의미였다.

아직까지도 차가 없다. 무거운 베이스기타를 메고 주 2회 예담학교의 먼 길을 갈 때도 차를 한 번 태워주지 못했고, 아플 때도 바로 실어다 주지도 못했다. 그렇게 남들이 다 누리는 차를 가진 편리함도 기본적으로 채워주지 못하면서, 온 가족이 각자 자전거를 타고 나들이하고 교회 가는 것을 평범하지 않은 낭만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도 딸은 "어렸을 때..." 얘기를 곧잘 하면서도 원망이나 불평을 전하지 않는다ㅜㅠ



완벽한 환경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기대수준을 꾸준히 낮춰줘서 여간해서는 행복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하게 해주었을 거라는 희망회로를 돌리고는 있지만, 여전히 풍족하게 채워주지 못하는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은 변함이 없다.

부모로서 우리가 준 것은 실물이나 물리적 혜택이 아니었고, 걱정과 불안으로 가진 것도 다 주지 못했지만, 풍족하지 못했고 서툰 육아 방식이었지만 쏟아부은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는 변명 같은 고백을 반복하고 있는데, 딸들은 자신들의 소소한 행복에 집중하며 괜찮다고 삶으로 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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