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_XCySmqe8P0&t=2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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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 서러운 눈물 흘려보냈지만 찾진 않았어
그냥 살다가 그대가 곁에 없으니 이별을 깨달았어
돌아보면 아주 멀리 가지 않아 잡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대 발자국 세월 속에 흔적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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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초상 - 이문세 5집 중에서
인생을 좀 더 살아보니 좀 알 것 같습니다. 젊은 날에는 유한함을 인식하지 못하여 뭐든 다시 기회가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살기도 한다는 것..
졸업식 때 학생들보다 감성적인 교사들이 더 슬퍼하는 건 시대의 흐름을 떠나서 떠나가는 제자들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는 나이 든 교사들의 현실적인 인식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졸업식을 앞두고 아내와 내기를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가 울면 내기에 져서 10만원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실은 내기에서 이기려 하기보다 울지 않으려는 저의 결단이었는데 그 결심도 10만원도 다 잃었던 기억입니다. 그 눈물에 비친 제자들은 저처럼 슬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지난 학교 송별회 때 이별을 아쉬워하시는 교감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젊을 때는 또 만나자는 말을 쉽게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기약을 못할 나이가 되었네.
잘 지내요.
우리의 삶은 강물의 빠른 물살에서 떠내려가는 것과 같아서 그렇게 서로의 손을 놓치면 다시 잡긴 힘듭니다. 우린 운 좋게 누군가를 비슷한 강물에서 만나서 또다시 정해진 때에 나이가 들수록 더 빨라지는 각자의 물줄기로 떠내려갑니다. 손을 놓지 않으려 애쓰지 않으면 우린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실은 그렇게 멀어져야 감당할 수는 있습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이문세 5집의 기억의 초상 노래를 들으면서 갑작스레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떠올렸습니다. 노래는 기억의 저장소와 같아서 노래를 듣다 보면 한 번씩 그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기도 합니다. 세월의 흐름으로 나만 저만치 가 있고 노래와 그때의 느낌과 기억은 거기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련하니 가슴 아프기도 합니다.
could have pp(그럴 수 있었다), might have pp(그랬을지도 모른다), would have pp(그렇게 했었을텐데) 등의 가정법적 표현은 현실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때로는 덕분에 완성되지 않은 아련한 그때의 기억들을 손상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 돌려주기도 합니다. 그런 아쉬움이 없다면 굳이 소환되지 않을 기억들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행복했다는 것이겠지요.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 행복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경우라도 이미 행복했던 거니 그걸로 충분하겠지요.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되어도 그리워하던 그때의 만남은 아니고, 현실의 만남은 기억에 의지하여 믿었던 그 모습이 아니니 추억의 훼손은 필연일 것이나... 그래도 우연이라도 한 번은 더 그때 친구들을 마주치고 싶은 가정법적인 바람(I wish...)입니다.
특히나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고향을 멀리 떠나온 저에게는 그런 우연의 만남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저는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추억만 부여잡고 있을 뿐이네요.
TMI
가족들은 보다 오랜 물줄기를 함께 하기 때문에 더 미련이 남아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하지만... 이미 제 딸은 대학생이 되면서 의도적으로 손을 잡지 않아야 할 결단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아니 제가 먼저 생각하기 전에 딸이 한 번씩 제 손을 뿌리칩니다. 마치 미운 세살 때 "싫어! 내가, 내가!"라는 말로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물론 그 때보다는 세련되고 암묵적인 반응으로 드러내긴 하지만...
그래서 이제 부모로서 예전과는 달리 더 해줄 수 있는데도 안 주고, 안 해주고, 안 도와주는 것으로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더 어려운 미션을 수행하는 단계에 가까웠다는 걸 슬픈 마음으로 인정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