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의 연결고리

by 청블리쌤

1.

추억은 현실과의 단절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했다. 교사는 재산과 명예보다 추억에 파묻혀 산다. 추억으로만 재산의 가치를 매긴다면 교사들은 갑부다.


2.


학생들의 행복의 기억 속에 한자리를 채워주시는 선생님은 참~ 좋으시겠어요.^^

저의 기억 속에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잖아요.^^*

한 제자의 편지


이러려고 교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학생들을 만나는 가장 행복한 그 순간부터 헤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는 건 교사의 특권이다.


3.

14년 전 제자들을 만났다.

어느덧 그들은 교사로 만났던 그 당시 내 나이가 되어 있었고, 내 큰 딸은 그들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내 블로그 대문 그림과 프사는 그 당시 학생 중 하나가 그려준 그 당시 나의 모습이다. 물론 14년 전 모습을 캐릭터로 사용하는 건 좀 사기 같긴 하지만 그저 마음만은 그때만큼 젊다는 이 캐릭터를 고집하는 이유다.


4.

그들을 만날 때 난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영어교사로서의 지금의 나보다 부족한 나를 만났던 것이어서... 지금의 나의 실력이었다면 그들을 좀 더 잘 가르치고 인생에 대한 원숙한 관점으로 더 잘 이끌었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교만과 나의 만족감일 수도 있다고...

우린 어떤 나이에서도 누구라도 그렇게 만나게 되는 것이니 더 잘 준비된 만남은 없는 것이라고..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진심을 다했던 것이라고...


블로그에서 처음 고3 담임을 하는 분에게 이렇게 조언을 드렸다.


결국은 선생님의 모습 그대로 진심으로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존재감만이 고3 담임 역할의 본질인 것 같아요. 행여나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 갖지 마시고 그저 선생님의 모습 그대로 아이들 곁에 있어주시기만 하면 돼요.


더 좋은 나의 모습과 만나면 좋았을 거라는 가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운명처럼 누군가를 만나서 우리가 가진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며 살아가면 되는 거다.


교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학생들과의 거리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전성기 때 인기를 생각하며 젊은 선생님들의 인기를 시기할 이유도 없다. 그들을 만났던 것이 의미 있었던 것은 그 나이 때 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내 나이 때 아이들을 만나 내 나이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주며 또 다른 기쁨을 만들며 산다.


5.

어떤 제자는 고등학교 때 친구는 몇 년 만에 만나도 어제 봤던 것처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게 신기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난 제자들의 만남에서 14년 세월의 어색함을 느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에 조건 없이 서로 있는 모습 그대로 만났기 때문이었을 거다. 잘 보이려고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심으로 아껴줄 수 있는 계산적이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그리고 생각해보면 고3 시절 학교라는 한 공간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도 했다.


교사인 나도 그 편안함으로 초대했던 제자들이 하나같이 다 고마웠다.


그들은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고 또 그렇게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받아들여진다는 그 특별한 느낌은 자존감과 큰 관련이 있다.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연료가 되기도 한다.


6.

그 짧은 만남의 시간에 오히려 14년 전 쑥쓰러워 내게 말도 잘 못 걸었던 학창시절 1년간의 시간보다 이미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제자는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14년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다 보니 예전의 좋았던 기억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덕분에 그때의 행복을 돌아볼 기회가 되어 너무 감사하다고... 그리고 자신을 기억해주어 감격했다고...

그리고 선물과 함께 이런 메모도 남겼다.


선생님 덕분에 학교 가는 게 항상 행복했습니다. 제 고3 시절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잔뜩 감동한 난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내가 더 행복했다고... 저질체력과 상처 잘 받는 소심함을 지니고도 단 한순간도 교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고 진심을 다할 수 있었던 건 너희들과 그 기억들 덕분이었다고...


7.

그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서 이야기를 듣기만 해야겠다는 다짐은 나의 몹쓸 직업병 앞에 무너졌다. 난 어느새 그들 앞에서 설교를 수업처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긴 설교를 졸지 않고 몰입해서 들어주는 제자들이 또 고마웠다.


8.

14년 전보다 난 나이만 든 게 아니라 교사로서 더 성장했다. 그래서 그들의 기억 속의 청년이 아닐 것임에도 난 그들을 만나는 걸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어떤 경험을 통해서도 우리는 성장하고 있는 것이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말자고...


9.

제자 중 누군가는 너무도 비싼 인생 수험료의 대가를 치르고 겨우 아픔을 극복하여 돌아왔다.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그는 이미 예전의 그 제자가 아니었다. 충분히 사랑스럽고 마음 따뜻한 감성을 지닌 학생이었지만 상상 그 이상으로 더 성숙하고 강해지기까지 한 모습이어 감사했고 대견했다.


10.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난 지 오래인 그들은 모두 잘 살고 있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했고 소중한 추억을 흐뭇한 후속편으로 업데이트해주어 고마웠다. 난 그렇게 그들의 인생의 여정과 나의 여정의 일부를 공유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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