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짝사랑이 망설여질 때 – 임시반 학생들에게

by 청블리쌤

I'll Be There라는 영화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I'm worried that you are waiting for a man that'll never show any interest in you, and that you'll be hurt.

16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게 된 자신의 딸이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자신은 16년간 그의 무심함에 상처를 입고 스스로 마음을 닫아 놓은 상태였지요. 알고 보니 그 남자도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기다렸지만요.

해석하면

난 걱정이 된단다. 네가 너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그리고 네가 상처받을 거라는 사실에..

뒤에 나오는 that 절은 worried 다음의 that 절과 병렬구조입니다.

그런데 딸의 대답은..

You worry too much!

걱정을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웬일인지.. 이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이제껏 새롭게 수업을 했던 학생들이요.. 그리고 임시 담임으로 만났던 여러분들..

우린 누구나 자신의 행동이나 시도하는 것이 헛된 것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어떻게라도 보상을 받고 싶어 하죠. 그것이 나의 감정에 관한 것이라면 더 그렇구요.

혹 나의 감정이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 같고 비슷한 감정을 받지 못할 거면 아예 나의 감정을 그렇게 삭여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런 걸 계산해 볼 여유가 없는 거지요.

처음 여러분들의 임시 담임을 맡게 되었을 때 남다른 마음을 가졌습니다. 한 달이지만... 여러분들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고 그 전환점에서 여러분들을 만난 거니까요.

저의 그 정상이 아닌(?) 행동에 주위에서는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임시 담임인데 너무 개입하는 거 아니냐구.

처음엔 그 말들이 귀에 들리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는 없고, 저의 방식대로 길들일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그저 거쳐 가는 임시 담임이었을 뿐이니까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청소에 너무 집착하는 거 아니냐? 이 교실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열심히 하려니 좀 억울하다.”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과연 얼마만큼 만남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고, 얼마만큼 그 교실에 있어야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스쳐 지나갑니다. 어떤 교실이든,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든.. 상대적으로 길고 짧으냐를 따질 수 있을 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똑같습니다. 시간의 길이를 무시할 수 없지만.. 시간의 길이가 반드시 만남을 귀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는 단 하루의 사랑이 나오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는 일주일간의 사랑만이 나옵니다. 그러나 몇 년을 만난 사람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거죠.

아쉬운 마음은 그겁니다. 시간의 길이나 그저 스쳐 지나간다는 생각으로 주저할 수는 없었는데...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영화 대사처럼..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혹 상처를 받을까 해서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

정말 그건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라는..

이제 정식 3학년이 되는 여러분들 앞에는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반 친구들(결국 그 친구들이 평생 기억되는 고등학교 급우가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담임선생님, 새로운 교과담담선생님...

만남에 대한 충실은.. 삶에 대한 충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축복된 만남을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이 중엔 정식 3학년이 되어 진짜 저를 담임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게 축복일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 2004년 2월 경덕여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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