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아픔을 함께 하는 상담자세)

by 청블리쌤

만성적으로 자신을 찾지 못하고 관계의 갈등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전해주는 정신과 의사의 집밥 같은 치유법(일명 적정심리학)을 소개받을 수 있는 책입니다.

우리가 가진 정신적 문제에 대해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일상 언어와 심리치료 전문가의 이상적이고 심층적인 영역의 중간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위로를 담고 있습니다.



존재 자체를 몸에 비유한다면 외모, 권력, 재력, 재능, 학벌 등은 몸을 감싼 여러 겹의 옷들이다. 넘치는 관심과 주목을 받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 아니라 그가 설치고 있는 옷에 대한 주목이나 찬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직장이나 학위, 직업이 ‘나’가 아니듯 내 돈, 권력, 외모나 재능도 당연히 ‘나’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가진 사람도 자기 존재 자체가 주목을 받지 못하면 심한 결핍이 생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소중한 가치보다 남에게 비칠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염려와 불안함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겉옷을 구하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목표로 하는 옷을 다 얻게 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걸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오랜 고통 속에서 확인하게 될 뿐이니 말입니다.


학교에서 늘 보게 되는 학생들의 상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으려 그 겉옷을 구하려 애쓰는 과정 중에 생긴 문제인 경우가 많으며 그 학교에서의 모습은 사회의 축소판이자 예고편이기도 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교사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는 아이들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돕고, 배움을 통해 성장하도록 하는 것 외에도 그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애쓰지 않아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일입니다. 그게 교과를 가르치는 일보다 어렵지만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아내기도 힘들지만 어느 선에서 그들의 고통에 관여할지에 대한 결정도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마음을 열었을 때도 현실적인 도움의 방법에 대해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 그들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알게 되었을 때, 특히 교사로서의 입장은 조언을 마구 날리는 일입니다. 그게 그들을 더 아프게 한다는 걸 느끼지만 그것 외에 해줄 것이 없으니 말이지요.


공부에 대한 상담을 하면 늘 결론은 "공부를 열심히 하자"입니다. 그걸 몰라서 아이들이 상담을 요청하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오히려 제가 고3 담임을 처음 해서 입시에 대해 거의 몰랐던 때 저는 아이들과 상담을 더 제대로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이 알고 있었다면 아는 것만큼 조언을 해주느라 그들의 아픔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저 진심으로 들어주기만 해도,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해도 상담이 될 수 있다는 걸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 깨달았습니다.


저자는 상대방의 아픔에 대해 취해야 할 반응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모든 관계에 다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특히 다양한 이유로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야 하는 학생들을 만나 상담을 하는 교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제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제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 리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비수일 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일상의 언어 대부분은 충조평판이다.

"그런 생각은 잊어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충조

그럴수록 네가 더 열심히 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지”- 충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봐"-충조

"그건 너를 너무 사랑해서 한 말일 거야."-평판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니?"-평판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야, 별다른 사람 있는 줄 아니"-충조평판

왜? 충조평판이 도움이 될 거라 믿어서라기보다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해줄 말이 별로 필요치 않다. 그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뭔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만약 그의 대답이 없어도, 그가 대답을 피하거나 못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공감에 관련해 일종의 클리셰가 있다. 공감은 누가 이야기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 달지 않고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건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도 함께 자극되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 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 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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