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 2년차 교사의 성장통
올해 중학교 교사 2년차다. 첫해보다는 덜 당황스러워하며 익숙함이 생기는 것만큼 여유가 있다. 기대를 낮추고, 필요한 역할을 재조정하면서 점점 퍼즐을 조금씩 더 맞춰가는 느낌이다.
얼마 전 고등학교에서 특히 고3 담임과 학년부장을 하시면서 큰 전문성을 발휘하시다가 올해 처음으로 중학교로 옮기신 선배 수학선생님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중학교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점들을 잘 찾아 나름 긍정적인 마인드로 잘 지내시고 계셨다.
그런데 불쑥 고3 수학수업을 하시다가 중학교 수업을 하시는 게 어떤지 질문을 드리니, 모 고등학교에서 수능수학 분석 초청을 받아 수능 문제를 풀면서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셨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만나서 행복하긴 하지만, 수업 자체에서는 긴장감도,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서 아이들을 이끌어가는 충족되는 느낌은 덜하다는 말씀도 이어주셨다. 고등학교 수학에서 쓰이는 수학기호 자체도 그리우시다고.
기호만으로 표현 가능한 것을 아이들의 용어로 구체화시켜 풀어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정말 답답하실 것 같았다.
겪어보니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가르치는 용어 자체가 다르다. 특히 중1과 고3의 격차는 그저 학교 급간의 차이 이상의 완전 다른 세상이다.
고등학교에서만 23년 이상 있었던 우리 앞에 놓인 중학교라는 또 다른 세상은 완전 새로운 도전이었다.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의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인 어린 미조를 입양하는 장면에서 이미 두어 번 파양으로 상처가 컸던 어린 미조는 입양하러 온 새엄마 될 분에게 이렇게 묻는다.
“몇 밤 자고 와요?”
엄마가 되묻는다. 몇까지 셀 수 있냐고? 어린 미조는 천까지 셀 수 있다니까 아이의 이해 범위에서 이렇게 영원을 이야기한다.
“천 밤, 또 천 밤, 또또 천 밤, 계속 천 밤, 그렇게 자고 오자. 근데 만약에 계속 있고 싶으면 우리 같이 쭉 살자. 약속!”
그 약속도 아름다웠지만,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눈높이를 맞추어준 것이 더 아름다웠다.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은 똑같은 상황을 마주할 때 각기 자신만의 언어와 세계의 한계 내에서만 온전히 이해가 가능한 거다.
아이가 이 정도는 알 거라는 것을 전제로 어른의 용어로 다그칠 건 아닌 것이다.
2년차가 되어 더 신경 쓰는 부분이 이런 거다. 작년 중학교 첫해에 난 충분히 수준을 낮춰서 아이들 눈높이에서 이야기하는 줄 착각했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내려가야 했다.
1년을 함께 지내고 나니 아이들의 수준이 머리로가 아니라 삶으로, 가슴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환기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회이자 위기를 의미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갑자기 시간과 공간을 한꺼번에 도약하며 건너뛰는 변화만큼의 간격이 있다. 그리고 그 공백은 학생 본인 스스로 메워야 한다.
교육특구가 아닌 지역에서 고등학교 1학년 영어를 가르치는 친구와 통화를 했다. 중학교 때 영어 100점도 맞고 전교 몇 등을 했다는 것과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를 따라갈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간격을 메우는 장치는, 시험기간이나 학원 없이도 꾸준히 학습하는 습관과 고등학교 수업이나 수준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기다. 그리고 마치 영어를 이해해야 영어로 된 문화를 체득할 수 있는 것처럼, 고등학교 세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 언어는 추상화된 언어이자, 체계화된 지식구조의 언어를 말한다. 구체적인 예시나 이야기를 한두 개의 기호로 압축하여 제시할 수 있는 것이 고등학교 과정이다. 그로 인한 지식의 깊이와 넓이는 중학교 수준과 비교불가다.
그리고 고등학교 수업은 중학교 교과의 완전학습을 배경지식과 전제로 진행하니, 선행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중학교 과정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다면 연결고리나 다리조차 끊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건 단기간에 복구불가다. 그러나 중학교에서 어떤 이유로든 제대로 학습하지 않은 학생이 긴 복구의 기간동안 인내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자기주도학습 습관형성 없이, 기본기 없이 갑자기 고등학교 공부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고등학교 언어의 기본을 배우기도 전에 심화과정 같은 선행에 내몰리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니 중학교의 발달단계에 맞는 생각과 사고가 중요하다.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언어로 바로 옮겨가는 것은 제대로 된 성장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학교에 머물 듯 안주하는 것으로는 중학교의 성취 자체가 고등학교 과정 적응을 보장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전환기에서 준비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년 연속 중학교 3학년을 하면서 그 다리 역할을 더 절실하게 그리고 실감 나게 고민하고 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가 아니라 그 아이들에게 더 그러하면 좋겠다.
물론 아이들은 아직 나의 언어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 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어떻게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를 연구해야 한다. 메시지는 똑같지만, 교사의 역량이 발휘되는 지점은 그들의 언어로 풀어내는 연구를 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교사가 뭐 어렵겠냐고, 그 정도 지식은 어른으로서는 다 아는데 그냥 가르치면 되는거지, 또 늘 똑같은 걸 가르치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진정한 교육의 효과를 무시한 말이다.
난 그들의 언어를 함께 배우면서 새롭게 교재 연구를 한다.
영어도 배우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자막에 기대지 않는 것 만큼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있어지는 것처럼 그들의 언어에 유창해질수록 더 큰 교육 효과가 기대될 것이다.
선배 선생님과 이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중학교 4년 임기를 채우면 초빙으로 고등학교에 다시 복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러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고, 이 나이의 나를 초빙교사로 받아줄 고등학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순환근무 인사규정에 해당되는 분들이 많다.
중학교에 와 보니 고등학교의 긴장감이 객관화되어 명확하게 보인다. 매 순간이 긴장이었다. 영어듣기도 등급을 결정짓는 내신시험의 일부이므로 진행 전부터 진행하는 순간까지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단 하나의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건 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뿐 아니라 감독교사나 영어듣기 진행교사도 마찬가지이다. 어제 중학교에서 영어듣기시험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진행했다. 이렇게 긴장감이 없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고등학교에서는 모든 생활이 생기부의 기록자료가 되고 입시에도 반영된다.
그 자리를 떠나오고 나니 어떻게 그 긴장감을 계속 이겨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또 중학교 와서는 시간외 근무를 단 한 번도 달아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에서는 기본 6시 20분 정도까지 보충수업을 하고, 야자 감독을 하기도 하며, 11시까지 심자 감독을 한 적도 있었다. 야자 감독이 아니라도 학생 상담을 위해서 저녁때 남아 있는 시간도 많았으며, 고3을 하면 그럴 시간은 더 늘어났어야 했다. 예전의 고3 때는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까지 자습 감독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는 학교에 있는 동안은 정신없이 업무와 수업에 떠밀리듯 지내지만, 어느 정도 칼퇴근이 보장되어 있다. 고등학교에서 내려오신 선생님의 퇴근 후 한참 쉬었는데도 저녁 8시가 안 되었더라는 이야기가 격하게 공감되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중학교를 겪어 보고는 다시는 고등학교로 못 돌아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정년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경우에는 더 그러하다.
적어도 내게 올해까지 이 중학교에서 최소 3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져 있다. 그 이후에 어찌 되든 지금 이 순간, 아이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다고 배우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고, 아이들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리라는 법도 없다.
그리고 자기만족으로 안주하고, 꼰대가 되지 않으려 늘 경계하며 몸부림치고 있다. 그 몸부림으로 우리 아이들은 나와 더불어 행복한 성장의 기회를 가진다. 아직 중학교 세계의 언어에 서툴지만 계속 배워가며 소통을 이어갈 것이다.
여전히 고등학교가 그립지만 중학교에 와 있어도 난 여전히 행복한 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