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기의 중요성

열두 발자국 - 정재승

by 청블리쌤
바둑을 둘 때 7급인 사람이 머리를 많이 쓸까요, 7단인 사람이 머리를 많이 쓸까요? 운전면허를 딴 지 일주일 된 사람이 머리를 많이 쓸까요, 운전 경력 7년 된 사람이 머리를 많이 쓸까요? 일주일 된 사람이 훨씬 더 많이 씁니다. 바둑이 7급인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바둑판에 바둑돌을 올릴 때마다 머리에서 난리가 납니다. 아주 중요한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킬 만한 수를 찾는 순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지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거죠. 바둑 7단인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순간에는 별로 머리를 쓰지 않고도 바둑을 둘 수 있을 만큼 숙련돼 있습니다. 그래야 진짜 중요한 상황일 때 자신의 인지적 에너지를 확 모아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사람은 암기를 안 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지식을 머리에 저장하고 중요한 기술은 몸에 체화하면서 기본적인 것을 훈련을 통해 학습해야, 매우 중요한 순간에 인지적인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는 수학 영재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수준의 문제를 풀 때 뇌 활동이 크게 늘어나지 않습니다. 수학 올림피아드 출제 문제 정도가 나오면 그제야 뇌의 여러 영역이 서로 활발히 신호를 주고받지요. 반면 평범한 중학생들은 중간고사 수준의 수학 문제만 줘도 뇌에서 불이 납니다. 훈련이 충분하지 않아 그 정도 수준의 문제를 푸는데도 많은 인지적 노력이 필요한 거죠. 반면 그들에게 수학 올림피아드 수준 문제를 주면, 뇌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만 시간의 법칙’같은 가설은 의미가 있습니다. (중략) 그만큼 창의적인 성취를 위해서도 훈련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주 묻습니다. 영어 모의고사 시간이 모자라는데 모의고사 문제를 많이 풀어야 하느냐고. 저는 아니라고 합니다. 모의고사를 빨리 풀고 싶을수록 모의고사보다 기본어휘와 구문에 더 공을 들여 기본기를 쌓으라고 조언합니다. 그렇게 독해할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해야만 자연스럽게 독해가 정확해지고 그 정확성을 바탕으로 의식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속도가 빨라진다고 근거도 이야기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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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박사의 열두 발자국이라는 신간도서를 행복하게 읽고 있습니다. 열두 개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는데 발췌해서 소개하기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지적 자극과 흥미와 유익함 등을 겸비한 훌륭한 책입니다. 과학자가 쓴 글이지만 인문학적인 느낌과 잘 어울리는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부분을 읽으면서 평소 학생들에게 강조하던 기본기에 대한 귀한 예증 거리를 얻게 된 셈입니다.

제 딸이 수학 선행 없이 혼자서 학교 수업만으로 고등학교 이과 수학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아 스스로 원리를 따지며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정형화된 틀을 바탕으로 반복적인 학습으로 숙달된 학생들보다는 우위에 있을 수 있지만 문제 푸는 속도에서는 불리합니다. 그래서 내신과 모의고사에서 시간이 늘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복과 지루함을 싫어하며 충분히 숙달되도록 훈련하지 못한 탓이지요. 그런 딸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귀찮음과 지루함에 굴하지 않고 훈련을 통해 딸아이가 재미있어 하는 고난도 문제를 마음껏 시간 내에 풀 수 있을 거라고... 기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연주하는 것이 아닌 힘겹게 코드 잡는 것부터 반복해야 하는 것처럼...
결국 창의력도 시작은 반복과 지루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야구 선수들도 처음부터 배트를 휘두르지는 않습니다.
결국 핵심은 기본에 충실함으로 얻은 여유로 인해 아껴둔 에너지를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는 선택과 집중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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