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핵심은 실존주의에 기반한 인간 탐구다. 작가는 불가항력적인 재앙에 처한 인간들이 애쓰고 노력하고 그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는 실존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 재앙의 출발이 무엇이고 그 해결책은 무엇이며 누구에게 책임이 있으며 그 근원에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며, 그런 무신론적 입장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삶을 살아내는 인간의 자세였다.
작가 자신도 폐병으로 재앙 같은 삶을 살아내었다고 한다.
페스트는 코로나 시국에 재조명 받고 있는 고전소설이다. 코로나가 아니라도 절망과 희망의 사이에 선 인간들의 군상과 그 심리를 충분히 생동감 있게 그려내었지만 코로나의 시절을 경험하는 우리를 감정이입의 수준으로까지 초대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페스트 상황은 분명 문자 그대로 전염병으로 받아들이며 읽는 것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릴 여지를 주지 않지만 작가는 페스트를 전쟁의 내면화 과정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작품 속의 페스트를 전쟁이라는 상황으로 바라봐도 충분히 더 말이 된다.
결국 전염병, 전쟁 등 인간의 힘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없는 재앙의 상황을 마주하는 우리의 심리는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불안함과 두려움이 엄습하는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바라볼 것인가?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의사 리유는 그저 성실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데서 그 답을 찾고 있다. 그리고 마음의 평온을 찾는 방법으로 ‘공감’을 말한다. 인간의 심리와 정서 상태와 감정 등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그 짐을 함께 나눌 때 어려움을 맞설 수 있는 힘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작가는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인간 스스로 성인이 되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해답 없는 명제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해피엔딩이라는 장치를 빌어 막연한 희망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가차 없이 묘사한다. 특히 어린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세밀하고 공감 가득한 묘사를 함으로써 인간 삶의 피할 수 없는 비극을 구체화시킨다. 전염병에서 살아남았더라도 죽음을 영원히 비껴갈 수 없으며, 단지 지연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때 이른 죽음은 늘 우리에게 숙연한 비장감을 가져온다.
재앙의 원인을 신에게서 찾는 것과는 별개로 재앙 이후의 신의 무개입성에 대한 작가의 회의는 어린아이의 죽음에서 절정에 달한다.
소설 속의 성직자는 재앙은 인간의 잘못에 대한 신의 징벌이니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작가의 논리는 인간의 죄로 인해 징벌적인 의미의 전염병이 창궐했다면 죄 없는 어린이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냐는 무신론적인 입장이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분명 범죄와는 일대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물론 범죄는 죄이지만, 모든 죄가 범죄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기독교의 전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행위로서의 죄인이 아니라 죄의 본성에서 행위로서의 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원리는 탄생과 소멸의 사이클이다. 그 과정 안에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일관되게 작용하며 그 일관된 원리를 설명하려 애쓰는 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원리를 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과학적인 설명으로 인간의 죄성과 심리 등의 모든 것을 규명할 수는 없으며,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듯 현상적인 것과 결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반응할 뿐이다.
이 자연 원리, 과학적인 원리를 벗어나는 것을 기적이라고 한다. 기적을 인정하더라도 기적이 세상의 기본 원리는 아니다. 예외적인 현상으로 원리를 정의할 수는 없으니까.
불은 중립적인 물질이지만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인간을 해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선 매번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험에서 건져내려고 창조섭리에 반하는 기적을 모든 경우에 일으키시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고통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시기보다 고통을 함께 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죽을 병자를 고쳐주신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영원히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모두가 아닌 불특정 소수의 사람들만 고쳐주셨다. 그로 인한 불공평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기적 사역은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이후의 완전한 회복과 부활의 예고편이다.
기독교인들은 상황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상황과 재앙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낼 수 없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주어진 감격적인 은혜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이 땅에서의 실존에만 의미를 두고, 이 세상이 그저 유일한 존재의 무대라면 인간은 모두 비극을 살아간다. 죽음은 예외 없이 적용되는 자연현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린아이의 죽음은 더 큰 비극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슬프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한 소망은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죽어가는 것에 대한 애도를 할 수 있지만 거기에 매여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유한함으로 인해 달려갈 길 다 갈 때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 가운데 소망을 품으며,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뤄갈 수 있다. 사랑은 공감하고 함께 하는 삶이다.
페스트 주인공 의사처럼 신을 믿지 않아도 성실함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이들의 성실함이 감사하게도 우리를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일상의 성실함을 강조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한 생존을 포기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 땅에서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완성할 수는 없다. 그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더불어 사랑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갈 뿐이다.
진정한 천국 소망을 가진 자들은 내세에 대한 희망만 품고 이 세상의 삶을 버려두지 않는다. 이미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행위로 증명되고 잘못의 경중으로 우리의 구원의 값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우리는 선행의 결괏값이 더디게 나타나기도 한다. 실존과 행위가 전부인 사람들보다는 아무래도 믿는 구석이 더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우리의 믿음은 필연적인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면서 우리의 성장과 성화의 과정을 지켜보시기도 하지만 은혜에 대한 감격이, 그 감사함이 십자가만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는 매 순간 변화되며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 같은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빛과 소금의 속성은 존재감 없이 반드시 필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니 우리의 행위로 우쭐해하거나 자랑할 이유는 없다. 우리 가운데 선한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 부여되는 예수님의 사랑과 그 품성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이미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나만 아니면 된다거나,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색하게 하는 오만이다.
사도 바울의 이 다짐 같은 말은 늘 영적인 거룩한 부담감을 준다. 끝이 있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자리를 지키도록 하는 간절한 동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 끝에 이르렀을 때의 안도감과 소망을 기대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my only aim is to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od news of God’s grace.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