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준다는 것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고

by 청블리쌤

이 드라마에 대한 논란이 기억났다.

24살 차이가 나는 남녀 주인공 관계 설정과 제목이 주는 느낌이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 것 같다.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라고 작가와 제작진은 노선을 확실하게 했지만 검색을 해보니 여러 가능성을 고려한 해석도 공존했다.

아저씨가 주는 느낌은 아름답거나 유려하지 않다. 나도 동네 푸근한 아저씨 같다는 학생의 말에 유쾌하지 않았다. 아빠 같다는 말과는 분명 느낌이 달랐다.

20대일 때 처음 뵈었던 나를 정말 아껴주었던 선배 선생님께서 나이가 들어도 난 안 변할 것 같지만, 혹 아저씨 냄새가 나면 나를 상대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뭐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그 느낌이 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적어도 순수함과 열정을 타협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선생님께서는 초임 시절 내가 스스로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초라한 느낌일 때 늘 내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괜찮은 교사라고... 나의 부족함에도 이후의 가능성을 더 봐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시고 칭찬해주셨다. 20, 30대에 개인홈페이지에 영어강의 글만 올렸었는데, 언젠가 영어 아닌 우리말로 된 글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게 될 거라는 예언 같은 격려도 해주셨다. 그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는데 지금은 그 예언처럼 영어관련 강의가 아니라도 그렇게 글을 쓰고 있다. 젊은 시절의 아직 철없던 글 하나에도 격한 반응을 진심을 담아 보여주셨고, 늘 겸손하게 나의 생각도 존중해주셨는데, 학생들을 사랑하며 받는 상처와 더 잘하고 싶은 의욕에 다 귀기울여 들어주시고, 공감해주시고, 더 훌륭한 교사가 되도록 노력할 동기와 힘을 늘 주셨는데...

그래서 지금 내가 쓰는 글이 어떤지, 학생들에게 내가 지금 어떤 교사로 살고 있는건지, 잘 하고 있는 건지, 지금 완전 아저씨가 된 나이에 내게 아저씨 냄새가 나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교육에만 헌신하였던 그 선생님은 오랜 투병 끝에 몇 년 전 사랑하는 교육현장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셨다ㅠㅠ

문득 선생님이 너무 그립다.

내게는 이 드라마의 <나의 아저씨> 이상의 의미였다.

드라마를 이번에 정주행하면서(수능 끝나고 둘째 딸과 함께 보기로 했는데 혼자 먼저 봐버렸다ㅠㅠ 그렇지만 드라마가 너무 좋아서 안 본 척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고단한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난 주로 학교에서 아이들만 만난다. 동료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내 삶의 무대에서는 학생들이 늘 주연이다.

자주는 아니고 한 번씩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진다. 아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구마줄기처럼 끝없이 그들의 고통과 고단함이 묻어나서 감당이 안 된다는 선생님들의 말씀도 자주 듣는다. 어느 정도의 거리는 서로를 위해 존중되어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인 거다.

드러나지 않는 심연의 고통이 아니라도, 아이들은 늘 자신의 꿈과 거의 일치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좌절하고 힘들어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사는 아이들은 생애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른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그보다 더한 고통과 고단함을 말해주는 순간, 그들은 꼰대가 된다.

고단함의 크기는 또래들 사이에서도 다르고, 연령대에 따라서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 크기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각기 그 순간의 고단함이 가장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후의 고단함의 무게까지 아이들에게 덤으로 얹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살아온 배경과 우리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을 바라보려 한다. 일반화의 오류도 이때 흔히 일어난다. 일반화의 오류는 때로 선입견이나 편견이 되기도 한다.

경청의 자세와 오랜 관찰로도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말로 하는 위로는 그저 공허한 울림이 될 수도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각기 다른 삶의 고단함을 여과 없이 전달한다. 보통 드라마와도 차별화되는 이 드라마의 설정이다. 미화된 구석이 별로 없다.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정말 거지 같을 수 있다는 걸 드라마에서 현실처럼 확인한다.

사실 드라마에서만큼은 환상을 꿈꾸고, 낭만을 누릴 필요가 있다고들 느끼고, 굳이 드라마에서까지 고단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이 드라마를 멀리했다면 그건 오해일 수 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삶의 고단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드라마다.

남주, 여주의 나이 차이가 왜 24살이나 나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12살 정도만 되어도 둘의 로맨스의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과도한 비현실적인 설정이라는 비판도 없었을 것이다.

24살의 차이라면 보편적 로맨스 가능 범위를 가뿐히 넘긴 것일테니 그 외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안전 장치 같은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로인해 사람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심지어 아이유 팬들은 드라마에 출연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는 기사까지 보았다.

논란이 있었어도 이 드라마는 명대사의 향연이었다. 그러나 그 명대사를 따로 떼어 놓는 것은 전체 그림에서 한 부분만 오려내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 맥락을 보아야 온전한 감동으로 느껴질 것이니까.

이 드라마가 위로를 전하는 이유는 어딘가 우리의 고단함과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황은 달라도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는 반드시 힘겨워하고 아파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칭찬 같은 느낌은 분명 아니었다. 충분히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조건 없이 나의 편이 되어 주는 누군가의 존재였다. 이 드라마는 과도한 설정 끄트머리에, 그 존재가 관계조차 규정되지 않는 사이에라도 인생을 바꿀 위로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이라서 무조건 위로를 얻는 것은 아니다. 어떤 관계인지 설정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관계 자체가 주는 친근함과 필연성이 우리가 힘을 얻게 되는 가장 높은 확률의 가능성이긴 하다. 그러나 혹 가족이나 주변의 명확하게 규정된 관계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면?

이 드라마는 어떤 면에서는 현실로 규정하는 관계 이상의 귀한 인연과 만남에 대한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 힐링의 관계에 저마다 비판의 소리를 얹는다. 그게 일반화될 상황도 아니고 자신의 시각에선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한 주변의 무관심과 불운 속에서 삶의 벼랑끝에 섰던 한 소녀를 "네 번 이상 잘해주며"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준 것은 그 소녀의 주변의 한 아저씨였다. 회사 상사이긴 했지만, 그 이상의 삶의 의미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그건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었다. 무기징역수처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 같은 아저씨의 삶에도 소녀가 그 의미를 밝혀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굳이 이성적인 호감여부로만 설명할 이유가 없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우린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줄 수 있다.

자신의 가족들에게만 잘한다면, 사랑하는 이들에게만 잘 한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귀하다 할 수 있겠는가.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원수가 아닌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측은지심

드라마에서 이러한 사랑의 출발점으로 둔 것은 이 단어였던 것 같다. 불쌍히 여김... 성경에서는 긍휼이라는 단어로 많이 표현이 된다.

누군가의 처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불쌍히 여길 수는 있다. 불쌍히 여기는 순간 끝난 거다. 그게 어떤 관계든 그 마음의 깊이만큼, 그리고 이왕이면 적극적인 행위와 말로 표현되면,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삶의 나락에서 빠져나올 힘이 되기도 하는 거다.

우리가 혼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어떤 기회로든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특히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보다 더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많이 가지지 않은 사람도 손을 내밀 수 있다. 극중에서 그런 역할을 했던 할아버지에게 남주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이런 말을 한다.

"존경합니다. 어르신." 이 짧은 대사의 울림도 가슴 속에 오래 남았다. 이 말이 희귀한 감동인 시대를 살고 있는 탓일 것이다.

이 드라마의 힐링의 힘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나온다. 상대방의 거지 같은 모습, 초라한 모습, 남에게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부족한 모습까지도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변화의 시작점이다.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분노하거나, 왜 그 모양으로 사냐고 다그치듯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애쓰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해주는 누군가의 존재가 있으면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고 변화와 성장을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의외의 사람과의 인연에서 비롯될 수도 있으니 때로 힘들어도 조금만 더 버텨볼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든지 서로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나의 아저씨>는 소유격의 의미만 담겨 있지 않다. 사소한 교감이나 도움으로 인해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서 그 아저씨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도 주연 같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주는 것에 대한 우월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주면서 그 이상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난 늘 학교현장에서 학생들을 만날 기회를 얻고,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도우려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느끼는 건,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받은 선물같은 은혜다. 내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나에게 계속 살아갈 힘을 주고 있었다. 나의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그 느낌은 삶을 지속하는 힘을 주기도 하지만,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학교에서 교사인 나를 화나게 하는 학생들이 분명 있다. 수업에 열중하지 못하거나, 지시를 잘 따르지 않거나, 대들고 반항하거나, 충분한 신뢰나 존중의 마음을 보이지 않거나, 자신의 삶에 대한 예의를 잘 보이지 않거나...

이 아이는 왜 매일 지각을 하고, 매일 얘기하는데도 계속 화장을 진하게 해서 학생부장 선생님의 전화까지 받게 만들고, 왜 이렇게 자기 멋대로 행동하면서 계속 소란스럽게 민폐를 끼치는가...

이해할 수는 없어도 내게 필요한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그들의 삶의 무게를 함께 느끼는 일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주면서 어떻게든 난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장과 변화를 기대하며 응원한다는 한결같은 마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내 인격의 훌륭함이 아니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많이 애쓰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측은지심이 들기도 하고, 측은지심이 들어서 사랑하기도 한다.

내게는 매번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거저 주어진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교사라는 이유로 내겐 늘 귀한 만남이 주어져 있다.

난 그저 그들에게 사소하게나마 <나의 선생님>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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